운동별 · 작전별 사적지 현황
지도 소작쟁의지
기본정보
| 사적지 분류 | 국내항일운동사적지 |
|---|---|
| 운동계열분류 | 사회운동 |
| 종류 | 거리 |
| 상태 | 변형 / 지도소작쟁의가 있었던 면사무소와 그 일대는 옛 모습을 확인하기 어렵다. |
| 정의 | 1925년 3월 지도 농민들이 소작쟁의를 일으킨 곳 |
관련정보
| 관련 사건 | |
|---|---|
| 관련 조직 | 지도소작인공조회/을축동맹 |
| 관련 인물 | 김상수/나만성 |
| 관련 내용 |
지도 소작쟁의는 1924년 1월 지도소작인공조회가 결성되면서 시작되었다. 지도소작인공조회는 김상수, 나만성 등 지식인 청년들 중심으로 결성되었으며, 창립목적은 소작인의 결속과 이를 통해 지주에 대항하기 위한 것이었다. 지도소작인공조회는 1924년 6월 경부터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하였다. 보리 2천 석에 대한 불납동맹을 결성하고 논 소작료 4할과 밭 소작료 등급 조정을 요구하였다. 지도소작인공조회는 면민대회를 이용하여 여론을 주도하였고 마침내 10월 소작료 4할을 이끌어냈다. 1924년 10월 말부터는 밭 소작료의 인하를 요구하였다. 그러나 지주와의 협상은 난항을 겪었고, 그 과정에서 갈등이 깊어졌다. 지도소작인공조회에서는 지주를 압박하기 위하여 임은노동조합, 지도청년회, 무산자동맹과 연대하여 마을별로 소작단체를 결성하기 시작하였다. 1925년 ‘송도을축동맹’을 시작으로 16일까지 36개의 마을에서 ‘을축동맹’이 결성되었다. 을축동맹이 결성되자 지주측에서는 이를 경계하기 시작하였다. 을축동맹 결성을 방해하기 위하여 경찰을 동원하였다. 2월 27일 목포경찰서에서 10여 명의 경찰이 출동하여 나만성 등 7명을 체포하였다. 지도소작인공조회에서는 3월 1일 간부들의 구속에 대한 대책과 이후 투쟁방향 논의를 위해 정기총회를 개최하였다. 이때 단체행동에 나서기로 결정되어 17일 소작인 400여 명이 면사무소에 모여 시위를 전개하였다. 소작인들은 4가지 요구사항을 제시하였고, 지주측에서는 그에 대한 답변을 주겠다고 안심시키면서 시위대는 해산하였다. 그러나 오히려 지주측에서는 소작권 이동이라는 강압적인 방법으로 사태를 악화시켰다. 소작인들은 25일 면사무소 앞에서 소작쟁의를 일으켰다. 26일에는 지주회장 박종섭의 집으로 찾아가 그를 규탄하기도 하였다. 27일에는 목포경찰서와 지도주재소 경찰들이 해산시키기 위해 출동하였으나 물러섰다. 소작쟁의가 일어나자 지주측에서는 논 소작료 4할 이내, 밭 소작료는 연 1회로 하되 면 18근부터 10근까지 할 것, 과실없는 소작권 박탈은 돌려줄 것 등의 내용으로 하는 타협안을 제시하였다. 이로써 지도소작쟁의는 소작인들의 승리로 귀결되었다. |
| 참고 문헌 |
『동아일보』, 1924년 11월 17일, 「지도소작결의」 『조선일보』, 1925년 2월 22일, 「지도 전체 을축동맹화!」 『동아일보』, 1925년 3월 4일, 「소작간부 또 검속」 『조선일보』, 1925년 3월 24일, 「전남 무안군에서 남녀합동의 소작시위」『동아일보』, 1925년 3월 30일, 「작인대 면소에서 철야」 『조선일보』, 1925년 3월 31일, 」지도지주의 횡포! 천여인의 소작권을 박탈」 탁현진, 「지도 소작쟁의의 전개 과정과 특징」, 『도서문화』56, 20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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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정보
| 당시 주소 | 전남 무안군 지도면 읍내리 일대 |
|---|---|
| 주소 | 전남 신안군 지도읍 읍내길 67-5 일대 |
| 도로명 주소 | |
| 위치 고증 | 1917년 측도한 1:50,000지도에 면사무소 위치가 표기되어 있다. 이를 현재 지도와 비교하여 위치를 확인하였다. |














지도 소작쟁의지 면사무소 터(2023년 촬영)
지도 소작쟁의지(2023년 촬영)
지도 소작쟁의지 전경(2023년 촬영)
지도 소작쟁의지 전경(2023년 촬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