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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별 · 작전별 사적지 현황

유인석 집

기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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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적지 분류 국내항일운동사적지
운동계열분류 의병전쟁
종류 가옥
상태 현재 자양영당 내에 안채와 문간채가 복원되어 있다.
정의 1895년 유인석이 스승 유중교를 따라 이주하여 지낸 곳.

관련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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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사건
관련 조직 유인석 의진 
관련 인물 류중곤(柳重坤), 유중선(柳重善), 김평묵(金平黙), 유중교(柳重敎), 서상렬(徐相烈), 주용규(朱庸奎), 유인석(柳麟錫), 안승우(安承禹), 김백선(金伯善), 홍사구(洪思九), 이범직(李範稷), 김동근(金東根), 최재형(崔才亨), 이범윤(李範允), 이상설(李相卨)
관련 내용 유인석(1842~1915)은 1842년(헌종 8) 강원도 춘천 남면 가정리에서 류중곤과 고령 신씨의 3남 2녀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태어났다. 본관은 고흥(高興). 자는 여성(汝聖), 호는 의암(毅庵)이다. 14세 때 유중선의 양자로 들어가면서 이항로의 문하에 들어가 김평묵과 유중교로부터 존화양이사상을 익혔다. 1889년 가을 유중교가 춘천에서 제천 장담으로 이주하자 서상렬, 안승우 등 여러 선비들이 장담으로 이주하였다. 1893년 유중교 사망 후 서상렬이 잠시 장담서사를 주도해 갔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유인석이 사우들을 이끌게 되면서 1895년 5월 장담으로 이주하였다.
1895년 흑의령(黑衣令)과 단발령의 선포와 을미사변이 일어나자 장담의 선비들은 유인석을 중심으로 모여 시국을 논의하고 향음례를 행하여 ‘처변삼사(處變三事, 변란에 대처하는 세 가지 방법으로 의병, 망명, 자결순국을 의미함)’를 논의하였다. 안승우가 유인석을 찾아가 의병의 대책을 묻자 기본 전략을 제시하였다. 다만 기본 노선은 망명의 길을 택하는 것이었으며, 모친상, 지휘능력의 부족 등을 이유로 의병대장 요청을 거절하였다. 1896년 2월 7일(음력 1895년 12월 24일) 선비들의 강청으로 유인석은 호좌의진의 대장직에 올라 충주성을 공략(1896년 2월 17일, 음력 1월 5일)하고, 사군지역과 영서지역을 중심으로 의병활동을 전개하였으나 일본군과 관군의 공습에 밀려 다시 제천으로 돌아왔다.
유인석은 가흥전투 패전의 책임을 묻고 군기를 세우는 과정에서 의병장들 사이에 신분 갈등으로 인해 자신이 아끼던 평민 출신 의병장 김백선을 처형하였는데, 결과적으로 의병의 약체화 현상을 초래하였다. 1896년 5월 25일(음력 4월 13일) 남산전투에서 안승우와 홍사구가 전사하여 패전하면서 제천을 빼앗겼으며, 1896년 7월 23일(음력 6월 13일) 낭천에서 서상렬마저 전사하였다. 8월 28일(음력 7월 20일) 유인석은 중국으로 건너가 위안스카이[袁世凱]의 지원을 얻기 위해 압록강을 건넜으나 먼저 청나라에 들어간 이범직이 경무관 김동근에게 잡혀 죽임당한 소식을 듣고 결국 제천의병을 해산하여 귀국시켰다(을미의병의 해산).
유인석은 의병 해산 후 남은 21명을 통솔하여 심양으로 향했다. 그러나 위안스카이에게 군사지원을 받는 일이 현실적으로 어려움에 처하자 요동 통화현과 회인현으로 이동하여 해외 근거지 마련을 구체화하고자 했다. 1897년 5월 고종의 소명을 받고 잠시 귀국했으나 1898년 1월 다시 요동으로 갔다가 의화단 사건을 피하기 위해 재귀국했다. 1900년 11월 황해도 평산에 머물며 강학과 향음례, 향약을 주도하고, 여러 지역을 순회하기도 했다. 1907년 대한제국의 군대가 강제 해산되자 국외로부터 원조 없이는 의병운동이 실패할 것으로 보고 연해주로 망명하였다. 러시아 국경 마을인 연추의 중별리를 찾아 최재형과 이범윤 등을 만나 「의병규칙」과 「관일약(貫一約)」을 제정하여 항일투쟁의 기틀을 삼고 국내외 항일무장세력의 통합을 구상하였다. 이후 함경도와 만주, 연해주의 연계성을 고려하여 구심점을 찾기 위해 맹령(孟嶺)으로 거처를 옮겨 이상설과 만나 국권회복을 논의하였다.
1910년 2월 의병연합체인 십삼도의군(十三道義軍)을 결성하여 도총재(都總裁)에 추대되었고, 한일합방 조약이 체결되자 각도 창의소로 「재고십삼도대소동포(再告十三道大小同胞)」를 보내는 한편 위안스카이에게 서한을 보내 한중연합으로 일제에 저항할 것을 건의하였다. 또한 이상설과 함께 성명회를 결성하여 일제 침략을 규탄하는 성명서를 열강 정부에 발송하였다. 이러한 유인석의 활동으로 인해 일본이 러시아에 강력하게 항의하였고, 연해주 한인들의 독립운동에 대한 탄압과 감시가 심해졌다. 결국 이범윤 등 7명이 체포되면서 십삼도의군은 해체되었다. 1915년 봉천성 관전현(寬甸縣) 방취구(方翠溝)에서 신병으로 신음하다 74세를 일기로 삶을 마감하였다. 정부는 1962년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참고 문헌 「잡보」,『매일신보』, 1898년 6월 14일.
구완회,『한말의 제천의병』, 집문당, 1997, 51~67쪽; 78~130쪽; 167~233쪽.
김상기,『한말 전기의병』,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09, 148~185쪽.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독립운동사자료집』1, 1984, 478~549쪽.
박민영, 「유인석의 연해주지역 독립운동과 그 역사적 의의」,『의암학연구』12, 한국의암학회, 2015, 95~113쪽.
송기섭, 「의암 유인석의 망명로정에서의 보화와 국권회복운동 고찰」,『의암학연구』14, 한국의암학회, 2016, 141~173쪽.
오영섭, 「을미 유인석의병 결성과 활동」,『의암학연구』7, 한국의암학회, 2009, 137~157쪽.
이동우, 「柳麟錫과 湖左義兵의 抗日義兵戰爭」,『의암학연구』14, 한국의암학회, 2016, 5~74쪽.
『의암집』(고전번역원 한국고전종합DB)
『성재집』(고전번역원 한국고전종합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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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정보

지역정보
당시 주소 충청북도 제천시 봉양읍 공전리
주소 충청북도 제천시 봉양읍 공전리 473
도로명 주소
위치 고증 유인석이 제천에 거주하였을 당시의 행적은『의암집』과『성재집』등에서 확인할 수 있다. 현재 유인석이 거주하던 곳은 자양영당 옆에 복원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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