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별 · 작전별 사적지 현황
권용일 집터
기본정보
| 사적지 분류 | 국내항일운동사적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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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운동계열분류 | 의병전쟁 |
| 종류 | 가옥 |
| 상태 | 권용일 집터는 현재 청풍호에 수몰되어 있으며, 도곡리 마을 주민 가운데 권용일 생가 마을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전혀 없다. 한수면 덕곡리 봉화재8길에 마을자랑비 및 권용일선생 창의공로숭모비가 세워져 있어 권용일의 행적을 기리고 있으나 생가지 및 묘소와 약 20㎞ 정도 떨어져 있다. |
| 정의 | 1907~1908년 이강년 의진에서 우군선봉으로 활약한 권용일이 태어난 곳. |
관련정보
| 관련 사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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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련 조직 | |
| 관련 인물 | 권용일(權用佾), 권태인(權泰仁), 이강년(李康秊), 이중봉(李重鳳), 김규흥(金圭興), 이범구(李範九), 김규철(金圭喆) |
| 관련 내용 | 권용일(1884~1971)은 1884년 5월 11일 아버지 권태인과 어머니 초계 정씨 사이의 가난한 집안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1894년 11세 때 한문서당에 입학하여 장재윤에게 배웠으나, 동학농민운동과 의병 등 혼란한 정세로 인해 학업을 유지하기 어려웠다. 16세 되던 해 아버지가 사망하였으며, 이후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농업에 종사하였다. 비록 글을 제대로 알지 못했지만 스승에게 배운 충(忠)・효(孝)・열(烈)을 기억하며, 18세 되던 해 제천을 떠나 강원도 원주, 공주, 오대산 등지를 떠돌아다니며 행상인의 일을 하였다. 20세 무렵에 공주에 있었는데, 이때 공부를 다시 시작하였다. 을사조약 이후 금오산에서 야은 길재의 고적과 병서를 공부하면서, 이곳에서 이강년을 처음 만났다. 1907년 6월 군대해산과 고종의 양위에 분개하여 원주로 거처를 옮겨 이강년 의진에 들어갔다. 이강년은 권용일을 우군선봉장으로 삼았다. 이후 크고 작은 전투에서 주로 우군장 이중봉의 휘하에서 활약하였다. 이강년이 체포된 이후에는 상경하여 재판 중이던 이강년의 시중을 들었고 이후 의병의 기세가 크게 꺾이자 수배를 피하여 은둔하였다. 후에 김규흥, 이범구, 김규철 등과 함께 중국의 위안스카이[袁世凱]에게 보내는 고종의 편지를 가지고 출국하다가 발각되어 동지들이 체포되자 정경로(鄭敬老)라는 가명을 쓰고 산삼 상인으로 가장하여 인천에서 소금 배를 타고 중국 망명길에 올랐다. 광복 후에 몰래 귀국하여 은둔생활을 하였으며, 1971년 음력 9월 5일 88세로 사망하였다. 정부는 1963년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
| 참고 문헌 |
「丁未倭亂倡義錄」,『창작과 비평』12-4, 1977.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독립운동사자료집』1, 1984, 222쪽, 229~230쪽, 232쪽, 241~242쪽, 244~245쪽, 254쪽, 256쪽, 277~278쪽, 282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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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정보
| 당시 주소 | 충청북도 청풍군 원서면 도곡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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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소 | 충청북도 제천시 청풍면 도곡리 172 |
| 도로명 주소 | |
| 위치 고증 | 제적등본에 권용일 집주소가 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