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별 · 작전별 사적지 현황
양양 3.1만세운동 준비지-양양감리교회
기본정보
| 사적지 분류 | 국내항일운동사적지 |
|---|---|
| 운동계열분류 | 3·1운동 |
| 종류 | 건물 |
| 상태 | 멸실 / 3.1운동 당시 건물은 멸실되었고, 현재 1926년 새롭게 지어진 건물이 자리하고 있다. |
| 정의 | 1919년 4월 조화벽, 김필선, 김재구 등 양양감리교회 청년들이 양양 3.1만세운동을 준비했던 곳 |
관련정보
| 관련 사건 | |
|---|---|
| 관련 조직 | |
| 관련 인물 | 조화벽, 김필선, 김재구, 김규용, 김계호, 김주호, 김봉운 |
| 관련 내용 |
양양의 만세운동은 1919년 3월 말 유학 계통과 기독교 계통의 두 갈래로 시작되었다. 유학 계통은 고종황제의 인산에 참례하고 돌아온 이석범이 주도하였다. 이석범은 임천리의 이교완 집에서 만세운동을 준비하였다. 여기에 양양보통학교 제1회 졸업생인 최인식이 합세하여 졸업생들을 끌어들였다. 기독교 계통은 양양감리교회가 주도하였다. 1919년 3월 말경 양양감리교회 조영순 전도사의 딸 조화벽이 개성에서 올 때 가방안의 버선 속에 독립선언서를 숨겨가지고 와 교회 청년 김필선에게 전달했다. 김필선은 그해 양양보통학교 졸업생으로 양양면사무소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그는 동창생이자 교회 청년인 김재구, 김규용, 김계호, 김주호, 김봉운을 모았다. 그들은 면사무소 등사판을 이용하여 독립선언서를 복사하고, 태극기를 만들었다. 그러던 중 임천리의 최인식과 연락이 닿아 합동으로 추진하게 되었다. 두 계통이 통합되면서 양양면과 서면의 각 마을에 책임자를 두고 만세운동 준비가 진행되었다. 4월 3일 이교완, 이건충의 집 등 몇 곳에서 태극기를 만들고 있었는데 일제 경찰이 이건충의 집을 급습하였다. 이에 이석범을 비롯한 20여 명이 체포되었다. 체포를 피한 최인식, 김필선, 김재구, 김규용, 김계호 등은 김종태의 집으로 본거지를 옮겨 계속 준비하였다. 최항식의 집에서도 준비가 계속되었고, 마을마다 책임자가 있었기 때문에 계획대로 다음날 만세운동이 벌어졌다. 4월 4일은 양양 장날로 양양에 들어오는 5개의 통로를 따라 인근 각지에서 만세 군중과 장꾼들이 모여들었다. 서쪽의 임천리로 통하는 방면에서는 거마리와 임천리의 군중이 만세를 부르며 양양읍으로 들어오다 일제 경찰과 대치하였다. 이때 양양읍내 교회 청년 100여 명이 군중을 지도하며 시위를 시작했다. 그러자 일제 경찰이 읍내로 이동하면서 시위대는 읍내로 들어오면서 만세꾼으로 가득차게 되었다. 양양읍 만세운동을 시작으로 양양지역에서는 강현면, 도천면이 합동하여 만세운동을 전개했다. 손양면, 강현면, 서면, 현북면 등에서 크고 작은 만세시위가 계속되었다. 양양감리교회는 1901년 미국 남감리회 선교사 로버트 하디가 설립하였으며, 조화벽이 1932년 양양으로 돌아와 설립한 정명학원이 있었던 곳이기도 하다. |
| 참고 문헌 |
「양양정명학원 졸업식」, 『매일신보』, 1939년 3월 21일 「각 학교졸업식 양양정명학원」, 『매일신보』, 1939년 4월 1일 강원일보사, 『강원항일사』, 2007, 221~242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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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정보
| 당시 주소 | 강원도 양양군 |
|---|---|
| 주소 | 강원도 양양군 구성사잇길 9 |
| 도로명 주소 | |
| 위치 고증 | 최인식 판결문과 『독립운동사』2에 관련 사실이 확인된다. 최양섭, 「일제하 양양지방 독립운동과 기독교인의 역할」, 목원대 신학대학원 석사논문, 1998, 15쪽에 양양감리교회 설립년도와 위치에 대한 내용이 있으며, 교회 홈페이지 연혁 등을 통해 위치를 비정하였다. |














양양 3.1만세운동 준비지 및 정명학원 터-양양감리교회(2021년 촬영)
양양 3.1만세운동 준비지 및 정명학원 터-양양감리교회 전경(2021년 촬영)
양양 3.1만세운동 준비지 및 정명학원 터-양양감리교회 전경(2021년 촬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