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별 · 작전별 사적지 현황
한범우 집터
기본정보
| 사적지 분류 | 국내항일운동사적지 |
|---|---|
| 운동계열분류 | 3·1운동 |
| 종류 | 가옥 |
| 상태 | 멸실 / 옛 모습은 사라지고 남아 있지 않다. |
| 정의 | 1919년 3월 27일 노림리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한 한범우가 태어나 살았던 곳 |
관련정보
| 관련 사건 | |
|---|---|
| 관련 조직 | 노림의숙 |
| 관련 인물 | 한범우(韓範禹), 한돈우(韓敦愚), 한태우(韓泰愚), 정현기(鄭鉉基), 김성수(金聖洙), 김일수(金一壽) 홍남표(洪南杓), 어수갑(魚秀甲), 오유영(吳惟泳), 유필준 |
| 관련 내용 |
한범우(1902~1920)는 노림의숙 졸업생으로, 노림리 만세시위운동을 주도한 인물이다. 1919년 3월 3일, 노림의숙 교사인 홍남표와 어수갑은 고종의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서울에 올라갔다가 독립선언서를 가져왔다. 이들은 3월 22일 거행된 제1회 노림의숙 졸업식장에서 졸업생 40여 명에게 독립선언서를 나누어 주었다. 3월 27일 오후 원주군수 오유영(吳惟泳)이 민심 수습차 출장을 나와 흥호리에서 시국강연회를 개최하였다. 전국적으로 만세운동이 거세게 일어나자 일제는 무력진압과 병행하여 민심의 동요를 막기 위해 말단 관리를 동원하여 주민들을 회유하고자 한 것이다. 강연을 듣던 노림의숙 졸업생들은 현장에서 항거하려다가 부론면 서기 유필준에게 저지되어 쫓겨났다. 곧바로 노림리로 돌아온 졸업생들은 한범우의 주동으로 한돈우(韓敦愚), 한태우(韓泰愚), 정현기(鄭鉉基), 김성수(金聖洙), 김일수(金一壽) 등 7인이 “대한독립만세”라고 쓴 깃발을 들고 길목에서 기다렸다. 오후 4시 30분경 군수가 도착하자, 김성수가 깃발을 흔들고 졸업생들이 철원군수의 사례를 들며 군수에게 독립만세를 부르도록 하였다. 그리고 독립운동의 정당성을 놓고 논쟁을 벌이며 만세를 불렀다. 급히 문막으로 돌아온 군수는 헌병을 출동케 하였고 한범우는 체포되고 다른 졸업생들은 피신하였다. 체포된 한범우는 원주로 압송되었다가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어 지역 10월을 언도받고 복역했다. 석방된 후 노림리로 돌아왔으나 고문 후유증으로 세상을 떠났다. |
| 참고 문헌 |
「한범우 판결문」(1919.4.24., 경성지방법원) 「한범우 판결문」(1919.5.24., 경성복심법원) 「한범우 판결문」(고등법원, 1919.6.2.1.) 국사편찬위원회, 「일제감시대상 인물카드」(한범우)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편, 『독립운동사』 제2권, 1971, 582~584쪽.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편, 『독립운동사』 제9권, 1977, 245쪽.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편,, 『독립운동사자료집』, 제5권, 1974, 961쪽. 광복회 강원지부, 『강원도항일독립운동사』Ⅲ, 1992, 358~359쪽. 원주시역사박물관편, 『1919년 3·1운동과 원주』, 2019, 37~41쪽. 오영교·왕현종, 『원주독립운동사』, 2005, 235~236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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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정보
| 당시 주소 | 강원도 원주군 부론면 노림리 275 |
|---|---|
| 주소 | 강원도 원주시 부론면 노숲길17 |
| 도로명 주소 | |
| 위치 고증 | 「일제감시대상 인물카드」(한범우)에 주소가 기재되어 있다. |














한범우 집터(2021년 촬영)
한범우 집터(2021년 촬영)
한범우 집터 전경(2021년 촬영)
한범우 집터 전경(2021년 촬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