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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별 · 작전별 사적지 현황

김혁 집터

기본정보

기본정보
사적지 분류 국내항일운동사적지
운동계열분류 해외독립운동가
종류 가옥
상태 도시개발과 도시 확장으로 인해 전체적으로 지형이 변하였다. 삼성반도체 기숙사 인근 텃밭 자리에 옛 주소지가 있어 활용이 용이하지 않다. 그러나 김혁이 태어나고 죽음을 맞이한 생가 터로 선양을 위한 방안 마련이 필요하다.
정의 신민부 집행위원장을 지낸 김혁의 생가터이다.

관련정보

관련정보
관련 사건
관련 조직 신민부, 대한제국육군무관학교, 대종교, 북로군정서, 흥업단, 성동사관학교 
관련 인물 김좌진, 최호, 나중소, 조성환
관련 내용 김혁(金赫, 1875~1939)의 본명은 김학소(金學韶)이며, 호는 오석(五石))이다. 용인 농서리에서 출생하여 1900년 1월 17일 대한제국육군무관학교 1기생으로 졸업하고 육군정위로 근무하던 중 1907년 8월 군대가 해산되자 비분하여 항일투쟁을 결심하고 고향으로 내려왔다. 1919년 기흥 3·30 독립만세운동 시위에 참가한 후 일경의 눈을 피하여 만주로 망명하였다. 8월 김호(金虎) 등과 함께 흥업단을 조직하여 단장에 김호를 추대하고 부단장으로서 항일투쟁에 전력하였다. 청산리전투에 참여한 후 1921년 1월에 영안현(寧安縣) 밀산(密山)에서 서일(徐一)·홍범도·지청천·김좌진(金佐鎭) 등과 합세하여 서로군정서·의용군·북로군정서·대한독립단·광복단 등 만주의 10개 독립군단체를 통합, 대한독립군단을 조직하였다. 이때 군사부장에 선임되어 러시아의 자유시로 이동했다가 자유시참변을 겪고 다시 만주로 돌아왔다. 1925년 3월 15일 북만 영안현에서 김좌진과 함께 신민부를 조직하고 중앙위원회를 열어 중앙집행위원장에 선임되어 활약하였다. 동년 6월 신민부가 목릉현(穆綾縣) 소추풍(小秋風)에 성동사관학교를 설립하자, 교장을 겸임하고 독립운동 요원을 배출하였다. 1927년 2월 중동선(中東線) 석두하자(石頭河子)에서 신민부총회 개최 중 일본과 만주 경찰 합동수색대의 기습을 받고 박경순(朴敬淳)·유정근(兪政根)·이춘섭(李春燮) 등 10여 명과 함께 체포되었다. 하얼빈 일본영사관 경찰서에 유치되었다가 이듬해 3월 20일 신의주경찰서로 압송되었다. 그해 4월 4일 신의주지방법원 검사국으로 송치, 최종 판결에서 징역 10년형을 선고받고 평양감옥에서 복역하였다. 1934년 5월 경성감옥(서대문형무소)으로 이감되었다가 1936년 8월 25일 가출옥하여 고향인 용인군 기흥면 농서리 254번지로 귀향하였으나 1939년 4월 23일 오랜 감옥생활로 얻은 중병을 이기지 못하고 순국하였다.
1962년 3월 1일 대한민국 건국훈장 국민장(독립장)이 추서되었다. 1974년 3월 1일 용인군 기흥면 농서리의 묘를 국립묘지로 이장하였다.
참고 문헌 「가출옥관계서류」(1935년)
「대한독립군군사탐사원 행동에 관한 건」(1922.1.30.)
「대한독립군군사탐사원 행동에 관한 건」(1922.9.13.)
<신민부의 신정책> 《동아일보》 1925년 6월 21일
용인문화원, 「김혁 후손 신쌍희, 김진모 증언자료」『구술생애사』9집, 2019년, 11-58쪽.
박환, 「김혁의 민족의식 형성과 민족운동」, 한『국독립운동사 연구』 2002.
김명섭,『한국사가 기억해야할 용인의 근대역사인물』,노스보스, 2015, 106∼115쪽.
용인문화원 편, 『한국독립운동과 용인』, 노스보스, 2019, 221~23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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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정보

지역정보
당시 주소 경기도 용인군 기흥면 농서리 254번지
주소 경기도 용인시 기흥구 농서동 254-4 일대
도로명 주소
위치 고증 1935년에 행형과에서 작성한「가출옥관계서류」를 참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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