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별 · 작전별 사적지 현황
전좌한 묘
기본정보
| 사적지 분류 | 등급분류 제외(항일운동) |
|---|---|
| 운동계열분류 | 해외독립운동가 |
| 종류 | 묘소 |
| 상태 | 공원묘역 사무실에서 관리중이며 후손 및 친척이 가끔 찾아온다 한다. |
| 정의 | 1926년 4월 조선혁명군대본영을 조직한 독립운동가 전좌한의 묘 |
관련정보
| 관련 사건 | |
|---|---|
| 관련 조직 | 경성상업실업단(京城商業實業團), 조선혁명군대본영(朝鮮革命軍大本營), 창의단(倡義團) |
| 관련 인물 | 계의산(桂義山), 김봉준(金鳳俊), 김운용(金云用), 김응선(金應先), 남정(南正), 송암우(宋岩于), 신화수(申華秀), 유해강(柳海崗), 이응서(李應瑞), 이일화(李一化), 임선재(任善哉), 전흥규(全興奎), 정명옥(鄭明玉) |
| 관련 내용 |
1919년 12월 비밀단체 경성상업실업단(京城商業實業團)은 전좌한의 조부인 전흥규(全興奎)에게 '대한민국임시정부군정서'명의의 납세불납 문서를 보냈다. 전좌한은 문서가 도착하자 동지 임선재(任善哉)와 함께 문서를 인쇄하여 배포, 게시하다가 일경에 체포되었다. 전좌한은 1921년 2월 9일 공주지방법원 대전지청에서 징역 1년형을 받았으며, 1921년 3월 19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원심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에는 같은 고향의 김응선(金應先)과 같이 계속 독립운동을 할 것을 의논하던 중 창의단원(倡義團員)이라는 계의산(桂義山)을 만나 총독부, 시청, 신궁 및 종로서 등에 폭탄을 투척하고 독립사상을 고취하는 포고문을 살포할 계획을 세웠다. 이에 전좌한과 김응선은 고향에서 폭탄 6개를 만들어 1925년 음력 9월초에 그중 1개를 옥천과 금산군의 경계에 있는 진위산중(鎭威山中)에서 실험하여 성공을 거두었다. 그리고 같은 마을의 김운용(金云用)·정명옥(鄭明玉)·송암우(宋岩于) 등에게 서울구경을 시켜준다는 구실로 이들을 동 거사에 가담시켰다. 1926년 1월 30일 계의산이 상경할 여비를 송금하여 옴에 따라 이들은 다음날 서울에 올라와 중국음식점 광흥원(光興園)에서 계의산을 만나 구체적인 거사계획을 들었다. 그러나 이들은 숙소인 청진동의 진일여관(進一旅舘)에 돌아오자 바로 일경에게 탐지되어 체포되었다. 전좌한은 이들과 행동을 같이 하지 않았기 때문에 체포되지 않고, 만주로 도피하였다고 하나 확실한 기록은 없다. 만주에서는 1926년 음력 4월 초순경에 길림성 중동철도연선 이도하자(二道河子)에 있는 유해강(柳海崗)의 집에서 남정(南正)·이응서(李應瑞) 등과 함께 비밀결사 조선혁명군대본영(朝鮮革命軍大本營)을 조직하고 4∼50명의 단원을 확보하여 군자금 모집, 경고문 인쇄, 배부 및 일제 주요기관을 파괴할 계획을 수립하였다. 이들은 1926년 10월 1일 경복궁으로 옮겨 지은 총독부 신청사의 낙성식을 기하여 주요기관에 폭탄을 투척하기로 하고, 전좌한은 선발대로 김봉준(金鳳俊)과 함께 권총과 탄환 및 각종 문서를 서울로 가지고 들어왔다. 전좌한은 동년 9월 22일 매부인 신화수(申華秀) 및 이일화(李一化)등과 함께 서울에서 체포되었다. 그는 1927년 8월 31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5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르다가 1931년 3월 26일 출옥하였다. |
| 참고 문헌 |
송상도, 『騎驢隨筆』, 국사편찬위원회, 1955, 350~352쪽. 국가보훈처, 『독립운동사자료집』 10, 1971, 822~823쪽. 박걸순, 「옥천지역 근대의 기억과 독립운동가」, 『중원문화연구』 24, 충북대학교 중원문화연구소, 2016, 163~164, 170~171쪽. 『동아일보』, 1927년 6월 21일, 「相關된 兩大事件 二十日에 豫審決定, 창의군단원 金應先사건과 군자금모집을 계획하던 全佐漢의 량대사건 예심이 결뎡되야 형무소로 서류 송달, 今日中公判에 廻付?」, 「被告全部十名」, 「原來부터 共謀」,「嘉會洞 後山이 活動의 根據地 표면으로는 경부보의 밀뎡질 교묘히 잠적타 재거하려 입경, 全佐漢의 活動經路」. 『동아일보』1927년 7월 10일, 「今月三十日 第一回公判, 金應先과 全佐漢의 량사건, 倡義軍團事件」」. 『동아일보』1927년 8월 11일, 「倡義團 金應先과 全佐漢 公判今日」. 『동아일보』1927년 8월 12일, 「官廳爆破前日에 發覺된 倡義團事件公判開廷, 경성시내 각관공서의 폭파를 게획했다, 그 전날에 잡힌 창의단사건의 공판개뎡, 傍聽者殺到早朝에 滿員」,「被告는 金應先 全佐漢 桂義山外 十名 罪名은 全部六種」, 「天下驚動을 꾀해 爆彈投擲計劃」, 「密偵의 活動과 法官의 疑心」, 「金應先付託으로 火藥提供을 是認, 被告鄭元得만 一部是認」. 『동아일보』1927년 8월 13일, 「倡義團事件의 公判 疑雲重疊中에 延期, 밀뎡의 관게가 수상한 이사건 수괴심리를 남긴채로 연긔돼, 秘密의 鍵은 全佐漢審理」, 「爆彈六個製造와 運搬은 桂義山이 擔當」, 「藥品提供是認 」. 『동아일보』1927년 8월 23일, 「全佐漢부터 審理」. 『동아일보』1927년 8월 27일, 「全佐漢에 五年 被告全部에 求刑, 창의단 사건피고 전부에게 오년이하 톄형과 벌금구형, 倡義團事件 昨日求刑」. 『동아일보』1927년 9월 1일.「倡義團의 判決 全佐漢에 五年言渡, 전좌한이하 피고젼부에게 오년이하의 중역을 언도해」. 「전좌한 등 3인 판결문」, 1927년 8월 31일, 국가기록원 독립운동관련 판결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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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정보
| 당시 주소 | 경기도 파주군 아동면 |
|---|---|
| 주소 | 경기 파주시 경기도 파주시 아동동 산 8(낙원공원묘원 내) |
| 도로명 주소 | |
| 위치 고증 | 2019년 6월 25일 파주 조사 시 묘의 위치 및 비문을 확인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