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별 · 작전별 사적지 현황
한용운 묘
기본정보
| 사적지 분류 | 등급분류 제외(항일운동) |
|---|---|
| 운동계열분류 | 3·1운동 |
| 종류 | 묘소 |
| 상태 | 원형보존/부인의 묘와 함께 옆으로 나란히 조성되어 있고, 관리사무소에서 주기적으로 관리하여 유지되고 있다. |
| 정의 | 만해 한용운의 유해가 매장되어 있는 곳 |
관련정보
| 관련 사건 | |
|---|---|
| 관련 조직 | 신간회(新幹會), 조선불교청년동맹(朝鮮佛敎靑年同盟) |
| 관련 인물 | 한용운(韓龍雲) |
| 관련 내용 |
한용운은 충남 홍성 출신이다. 호는 만해(萬海)이며 승려이다. 처음에는 동학혁명에 가담하였으나 실패로 끝나자, 1896년 설악산 오세암(五歲庵)으로 들어갔다. 1905년에 인제(麟蹄)의 백담사(百潭寺)에서 승려가 되었다. 1910년 중국으로 건너가 독립군 군관학교(軍官學校)를 방문하여 격려하고, 만주와 시베리아 등지로 유랑하다가 1913년 귀국하여 불교학원(佛敎學院)에서 교편생활을 하였다. 1916년에는 서울의 계동(桂洞)에서 월간지 「유심(惟心)」을 발간하여 문화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1919년 2월 24일에 최린(崔麟)으로부터 독립운동에 대한 계획을 듣고 적극 참여하기로 결심하였다. 이에 해인사(海印寺)의 승려인 백용성(白龍城)에게도 알려 불교도로서 적극 참여하도록 권유하여 민족대표로 서명할 인장을 위임받았다. 28일에는 재동(齋洞) 손병희의 집에서 다른 민족대표들과 회합하여 독립선언에 따른 제반준비 사항에 대한 최종 협의를 하였다. 3월 1일 인사동의 태화관(泰華館)에 모인 민족대표를 대표하여 인사말을 하고, 만세삼창을 외친 뒤 출동한 일본 경찰에 의해 체포되었다. 1920년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과 출판법 위반 혐의로 징역 3년형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1926년에는 시집 「님의 침묵」을 발간하여 저항문학에 힘썼고, 1927년에는 신간회(新幹會)에 가입하여 중앙집행위원으로 경성지회장(京城支會長)을 맡았다. 1931년 조선불교청년회(朝鮮佛敎靑年會)를 조선불교청년동맹(朝鮮佛敎靑年同盟)으로 개칭하여 불교를 통한 청년운동을 강화하고, 월간지 ≪불교≫를 인수하여 불교의 대중화와 항일독립 투쟁사상 고취에 힘썼다. 1944년 지병인 신경통으로 병고를 겪다가 독립을 보지 못하고 서거하였다. 시신은 미아리의 화장장에서 불교식으로 화장된 후 이곳 망우리에 안장되었다. 정부에서는 1962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
| 참고 문헌 |
구리시, 『구리시지』 상, 1996, 1072~1077쪽. 구리시, 『구리의 역사와 문화』, 1996, 185~186쪽. 김영식, 『그와 나 사이를 걷다-망우리 비명으로 읽는 근현대 인물사』, 골든 에이지, 2009. 구리문화원, 『망우 묘역에서 만난 근현대 역사 인물』, 2015. 서울역사편찬원, 『서울역사답사기2-관악산과 아차산일대』, 서울역사편찬원, 2018, 307~310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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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정보
| 당시 주소 | 경기도 양주군 구리면 양암리(망우리) |
|---|---|
| 주소 | 경기도 구리시 교문동 산 84-2 |
| 도로명 주소 | |
| 위치 고증 | 묘비석이 존재하고 있으며, 정남선(망우리묘역 해설사)의 증언으로 그 내용을 확인하였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