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별 · 작전별 사적지 현황
오세창 묘
기본정보
| 사적지 분류 | 등급분류 제외(항일운동) |
|---|---|
| 운동계열분류 | 3·1운동, 민족주의독립운동, 문화운동 |
| 종류 | 묘소 |
| 상태 | 원형보존/관리사무소에서 주기적으로 관리하여 유지되고 있다. |
| 정의 | 위창 오세창의 유해가 매장되어 있는 곳 |
관련정보
| 관련 사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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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련 조직 | |
| 관련 인물 | 오세창(吳世昌) |
| 관련 내용 |
오세창은 서울 출생으로 그의 부친은 개화의 씨앗을 뿌린 역관 오경석이다. 20세에 역관이 되어 1886년 박문국 주사로 있으면서 한성주보 기자를 겸임했다. 우정국 통신국장 등의 관직을 거쳐 1897년 일본으로 건너가 1년간 도쿄외국어학교 조선어 교사를 지냈다. 개혁당 사건에 연루되어 1902년에 일본으로 망명하였고 그곳에 있던 손병희의 권유로 천도교에 입교한 뒤 그의 참모로 활동하였으며, 1919년 3·1운동 당시에는 천도교 대표로 33인의 한 사람으로 서명했다. 손병희 사후 천도교 내부의 갈등 속에서도 비타협적인 보수파 노선을 견지했다. 광복 후 건국준비위원회 의원으로 활동하였고 1946년 8월 15일에는 민족대표로 일본으로 건너가 대한제국의 국새를 돌려받았으며 1949년에는 김구의 장의위원장을 맡는 등 원로 지도자로 활동하였다. 당대 최고의 서예가로서 1938년 서울 서쪽 노고산 공동묘지 무연고 묘를 망우리 공동 묘지에 합장하고 쓴 ‘경서노고산천골취장비(京西老姑山遷骨聚葬碑)와 방정환·설태희 등의 비문을 남겼다. 1953년 4월 6·25전쟁 중에 대구에서 사망하였으며 사회장이 거행되었다. 국회에서는 명복을 빌기 위해 1분간 묵념하고 세비의 1할을 각출하여 조의금으로 전달했다고 한다. 1953년 11월 8일 유골을 망우리 공동묘지에 안장하였다. |
| 참고 문헌 |
구리시, 『구리시지』 상, 1996, 1059~1063쪽. 구리시, 『구리의 역사와 문화』, 1996, 281~282쪽. 김영식, 『그와 나 사이를 걷다-망우리 비명으로 읽는 근현대 인물사』, 골든 에이지, 2009. 구리문화원, 『망우 묘역에서 만난 근현대 역사 인물』, 2015. 서울역사편찬원, 『서울역사답사기2-관악산과 아차산일대』, 서울역사편찬원, 2018, 300~302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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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정보
| 당시 주소 | 경기도 양주군 구리면 양암리(망우리) |
|---|---|
| 주소 | 경기도 구리시 교문동 산 84-2 |
| 도로명 주소 | |
| 위치 고증 | 묘비석이 존재하고 있으며, 정남선(망우리묘역 해설사)의 증언으로 그 내용을 확인하였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