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별 · 작전별 사적지 현황
김구 필적 암각문-의정부 석굴암
기본정보
| 사적지 분류 | 국내항일운동사적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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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운동계열분류 | 기타 |
| 종류 | 기타 |
| 상태 | 석굴암 입구에 안내판이 있으며, “石窟庵”, “佛”, “金九”가 바위에 새겨져 육안으로 확인될 만큼 상태가 양호하다. |
| 정의 | 1948년 가을 김구가 남긴 친필을 언론인 남상도 외 7인이 바위에 명문한 곳 |
관련정보
| 관련 사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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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련 조직 | |
| 관련 인물 | 김구(金九), 남상도(南相燾) |
| 관련 내용 |
김구는 황해도 해주 출신이다. 1893년 동학(東學)에 입도한 후 이름을 창수(昌洙)라 개명하였다. 1894년에는 팔봉 접주(八峰接主)로 임명되어 동학군의 선봉장으로 해주성(海州城)을 공략하였으나 실패하였다. 당시 안중근(安重根) 의사(義士)의 부친인 안태훈(安泰勳)에게 의탁하였다. 1896년 안악군(安岳郡) 치하포에서 일본군 중위 토전양량(土田讓亮)을 만나게 되자 명성황후(明成皇后) 시해사건에 격분하여 그 자리에서 칼을 빼앗아 그를 찔러 죽였다. 이후 체포되어 해주옥을 거쳐 인천감리영으로 이감되었다. 1897년 7월에 사형이 확정되었으나 광무황제(光武皇帝)의 특명으로 사형 직전에 집행정지령이 내려졌다. 1898년 탈옥하여 공주 마곡사(公州 麻谷寺)에 들어가 삭발하고 중이 되었으며 법명은 원종(圓宗)이라 했다. 1899년 환속하여 고향으로 돌아왔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이준(李儁)·이동녕(李東寧) 등과 함께 구국운동에 앞장섰다. 1906년 해서교육회(海西敎育會) 총감(總監)이 되어 학교 설립을 적극 추진하였으며 황해도 서명의숙(西明義塾)에서 교원생활을 하였다. 1908년 신민회(新民會)에 가입하여 구국운동을 전개하였다. 1909년 안중근 의사가 하얼빈의거에 공모 혐의를 받아 투옥되어 몇 달 후 해주(海州) 지방법원으로 이송되었다가 증거 불충분으로 불기소 석방되었다. 1911년 신민회원 체포 때 2년형을 언도받고 수감 중 안명근(安明根)의 사내총독(寺內總督) 암살사건에 연루되었다고 하여 15년형을 언도받아 17년형의 징역을 선고받았다. 그 후 감형되어 1915년에 출옥하게 되었다. 1919년 3·1운동에 가담한 뒤 상해(上海)로 망명하여 이동녕을 만나 임시정부의 경무국장에 취임하였다. 1924년 임시정부의 국무총리 대리로 임명되었으며 1926년에는 임시정부의 국무령(國務領)에 취임하였다. 1927년에는 헌법을 개정하여 임시정부를 위원제로 고치고 국무위원에 취임하였다. 1928년에 이동녕·이시영과 함께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을 조직하여 민족진영의 단합을 꾀하였다. 1930년 국무령(國務領)에 재선되었으며, 1931년에는 한인애국단(韓人愛國團)을 조직하고 그 단장에 취임하였다. 1932년 1월 이봉창(李奉昌)의거와 4월 윤봉길(尹奉吉)의 상하이 홍구공원(虹口公園) 의거의 배후로 지목되어 임정요인들과 함께 강소성(江蘇省) 가흥(嘉興)으로 피신하였다. 1933년 5월에는 중국의 장개석(蔣介石) 총통(總統)을 만나 낙양군관학교(洛陽軍官學校)에 한인들의 입교하게 하였다. 1935년 11월 가흥(嘉興)에서 임시의정원 비상회의를 열고 국무위원으로 재선하였으며 이동녕·조경한(趙擎韓)·차이석(車利錫) 등과 함께 한국국민당(韓國國民黨)을 창당하고, 임시정부를 진강(鎭江)으로 옮겼다. 1938년 남목청(南木廳)에서 조선혁명당원 이운한(李雲漢)의 총격으로 중상을 입어 1개월 동안 입원한 뒤 겨우 목숨을 건졌다. 그러나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임정이 진강(鎭江)에서 장사(長沙), 광동(廣東), 유주(柳州)로 옮겨 다녔다. 1939년 광주(廣州)로 갔다가 장개석 총통의 도움으로 중경(重慶)으로 옮긴 뒤 임시정부 주석(主席)의 자리에 취임하였다. 1940년 중경에서 광복군 총사령부의 성립식을 거행하였으며, 임시정부는 기강으로 옮겨 전당대회를 개최하고, 각 단체를 통합하여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을 창당하였다. 같은 해 9월에 임시정부를 중경으로 옮긴 뒤, 임시정부의 임시약헌 개정과 더불어 국무위원회 주석으로 선출되었다. 1944년 개정된 헌법에 따라 다시 주석(主席)으로 임명되었으며, 섬서성 서안(陝西省西安)과 안휘성(安徽省) 부양(阜陽)에 광복군 특별훈련단을 설치하고 미군과 oss훈련을 적극 추진하였으나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항복함에 따라 국내진공작전은 실현되지 못했다. 1945년 11월 23일 임시정부 국무위원과 함께 환국하였으며, 1946년 2월 비상국민회의(非常國民會議)가 조직되자 부총재에 취임하였다. 1947년 1월 비상국민회의가 국민의회로 개편되어 부주석(副主席)에 취임하였다. 1948년 4월에 남북협상차 평양에 갔다 왔다. 1949년 6월 26일 경교장(京橋莊)에서 안두희(安斗熙)의 흉탄에 맞아 서거하였다. 정부에서는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의정부시 도봉산 회룡사(回龍寺) 서쪽에 있는 석굴암은 김구가 중국 상하이(上海)로 망명하기 전에 한때 피신하였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김구는 해방 후에도 이곳에 자주 들러 소요하며 지난 일을 회상하곤 하였다고 한다. 1948년 가을, 김구 선생이 이 석굴암을 찾았을 때 당시 언론인 남상도 외 7인이 〈석굴암 불 무자 중추 유차김구(石窟庵 佛 戊子 仲秋 遊此金九)〉라는 친필을 받았다. 이를 기념하고자 그들은 친필명문을 조각하기로 마음먹었으나 완공식 전에 김구가 사망하였다. 의정부에서는 김구의 피 묻은 조끼 조각을 시신으로 삼고, 당시 양주국민학교(현 중앙초등학교)교정에서 영결식을 거행한 후 이곳 석굴암에 김구의 위패를 모시고 이곳을 백범사라고 이름 지었다. 백범사 주관위원회에서 봄가을로 추모하고 있다. |
| 참고 문헌 |
의정부시, 『시정삼십년사』 하, 1994, 1602~1604쪽. 의정부문화원, 『의정부 역사여행』, 2001, 37쪽. 의정부문화원, 『의정부시사』 6, 의정부시, 2014, 292~294쪽. 『경향신문』, 1949년 7월 9일, 「遺影과 遺血等을 安置 故白凡翁永訣式各地서 嚴修」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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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정보
| 당시 주소 | 경기도 양주군 시둔면 호원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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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소 | 경기도 의정부시 전좌로 155번길 186-95 |
| 도로명 주소 | |
| 위치 고증 | 당시 현장에서 찍은 사진과 권현(광복회 의정부시지회 사무장)의 증언을 통해 위치를 확인하였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