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별 · 작전별 사적지 현황
박영신 집 앞 3·1운동 만세시위지
기본정보
사적지 분류 | 국내항일운동사적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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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계열분류 | 3·1운동 |
종류 | 거리 |
상태 | 박영신의 집은 변형되었으나 그 위치에 자리하고 있다. 집 앞 도로는 3.1만세운동 당시의 도로보다 넓어지고, 도로도 포장되었다. |
정의 | 1919년 3월 12일 쌍계교회 교인들과 쌍계동민 200여 명이 만세시위를 벌인 곳 |
관련정보
관련 사건 | 비안공립보통학교 만세시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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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조직 | 쌍계교회 |
관련 인물 | 박영화(朴永和), 김명출(金明出), 김원휘(金原輝), 박세길(朴世吉), 배도근(裵道根), 배달근(裵達根), 배중엽(裵重曄), 이일만(李一萬) |
관련 내용 |
의성군 비안면 쌍계동의 만세운동은 쌍계교회의 박영화(朴永和) 목사가 이끌었다. 그는 평양에서 돌아온 괴산교회 김원휘(金原輝) 조사로부터 만세 소식을 듣고, 동생 박영신(朴永新)과 배달근(裵達根)·배중엽(裵重曄) 등과 만세운동을 논의하였다. 이들은 은밀히 거사를 계획하는 한편 배도근(裵道根)·이일만(李一萬)·김명출(金明出)·박세길(朴世吉) 등을 새롭게 참여시켰다. 만세 날을 3월 13일로 정한 이들은 박영신의 집에서 태극기 200장을 만들었다. 그런데 거사일 하루 전인 12일 오전에 예상하지 못한 일이 벌어졌다. 비안공립보통학교 학생들이 학교 뒷산에서 만세시위를 펼친 것이다. 이에 쌍계교회 교인들과 마을 사람들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학생들이 마을로 돌아오자 사람들은 곧바로 만세시위에 들어갔다. 박영화·박영신·배중엽은 박영신의 집 앞에 모인 사람들에게 태극기를 나누어주었고, 마을 사람들은 태극기를 흔들면서 독립만세를 외쳤다. 150-200여 명의 군중 가운데는 학생도 50여 명 있었다. 이들은 동네를 돌다가 교회 뒷산에 올라가서 만세를 부른 후 해산하였다. 그런데 오후 4시쯤 의성경찰서에서 파견한 경부(警部)와 순사부장 각 1명이 들이닥쳤다. 이들에 의해 이일만을 비롯한 주도자 5명이 붙잡혔다. 잠시 피신했던 박영화 목사는 스스로 찾아가서 항일 독립만세시위의 정당성을 주장했다고 전한다. 쌍계동 시위에 참여했던 사람들 가운데 18명이 재판에 넘어가 실형을 받았다. |
참고 문헌 |
○ 경상북도경찰부, 『고등경찰요사』, 1934, 25쪽. ○ 김희곤 외, 『의성의 독립운동사』, 의성군, 2002, 218쪽. ○ 「박영화 등 판결문」, 대구지방법원, 1919년 4월 4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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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정보
당시 주소 | 경상북도 의성군 비안면 쌍계동 2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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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 경북 의성군 비안면 강변길 593-1 앞 도로 (쌍계리 200-21 앞 도로) |
도로명 주소 | |
위치 고증 | 「박영화 등 판결문」에 관련 역사적 사실이 있으며, 2009년 조사 당시 사적지 위치는 박영신의 아들 박세동(당시 89세)의 증언을 토대로 확정하였으며, 이번 조사에서 손부 구미화를 통해 다시 확인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