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별 · 작전별 사적지 현황
비안공립보통학교 뒷산 3·1운동 만세시위지
기본정보
사적지 분류 | 국내항일운동사적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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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계열분류 | 3·1운동 |
종류 | 산야 |
상태 | 비안공립보통학교 학생들이 만세시위를 펼친 뒷산에는 현재 기념탑과 기념 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
정의 | 1919년 3월 12일 비안공립보통학교 학생들이 의성에서 첫 만세시위를 펼친 곳 |
관련정보
관련 사건 | 비안공립보통학교 만세시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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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조직 | 비안공립학교 |
관련 인물 | 박만녕(朴萬寧), 박기근(朴基根), 우희원(禹熙元), 정인성(鄭寅成) |
관련 내용 |
의성군의 첫 만세 시위는 비안공립학교 학생들이 주도하였다. 학생 가운데 나이가 가장 많았던 박만녕(朴萬寧)은 다른 지역의 만세 소식을 전해 듣고, 3월 9일 밤 박기근(朴基根)을 찾아가 만세 계획을 논의하였다. 이들은 우희원(禹熙元)·정인성(鄭寅成)에게도 이 사실을 알리고, 함께 준비하였다. 3월 11일에 이르러 이들은 학생 150명을 모아 "오늘 수업을 마친 뒤 비안장터에서 만세를 부를 것이니 모두 모이라."고 일러두었다. 수업을 마친 학생들은 예정대로 장터로 나갔다. 그런데 장터에 도착하니 이미 경찰들이 지키고 있었고, 졸업생들이 준비하기로 한 태극기도 보이지 않았다. 할 수 없이 박만녕은 거사를 하루 미루었다. 만세계획이 드러나자 교장은 학생들을 위협하였다. 학생들이 뜻을 굽히지 않자, 교장은 3월 12일 아침 전교생을 운동장에 모아놓고 주도자를 교장실로 데려갔다. 먼저 이들을 훈계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 사이 학생들은 산으로 올라가 만세를 부르기 시작했다. 만세소리가 울리자 박만녕을 비롯한 4명도 교장실에서 뛰어나와 만세대열에 합류했다. 만세소식에 비안주재소 순사들이 도착하자 학생들은 흩어졌고, 우희원·박기근·정인성 3명은 그 자리에서 검거되고 말았다. 우희원·박기근은 징역 8개월, 정인성은 징역 6개월에 처해졌다. 박만녕은 검거를 피해 다니다 1921년 체포되어 징역 3개월을 받았다. 비안공립학교 만세시위는 의성에서 일어난 첫 만세시위로 이후 의성지역 만세운동의 도화선이 되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의를 지닌다. |
참고 문헌 |
○ 조선총독부, 『近世韓國五萬分之一地形圖(1914-1918)』, 경인문화사, 1998, 197쪽.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 3-3·1운동사(하), 1983, 368-370쪽. ○ 광복동지회 의성분회, 『의성항일 투사들의 사적』, 1997, 221쪽. ○ 김희곤 외, 『의성의 독립운동사』, 의성군, 2002, 209-210쪽. ○ 「우희원 등 판결문」, 대구복심법원, 1919년 5월 29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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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정보
당시 주소 | 경상북도 의성군 비안면 서부동 비안공립보통학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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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 경북 의성군 비안면 서부리 산4 |
도로명 주소 | |
위치 고증 | 「우희원 등 판결문」에 관련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비안공립보통학교는 이두초등학교 비안분교(폐교)로 그 이름이 바뀌었으나 위치가 바뀐 적이 없으며, 기념탑과 기념 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