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별 · 작전별 사적지 현황
이수악 생가-존재종택
기본정보
| 사적지 분류 | 국내항일운동사적지 |
|---|---|
| 운동계열분류 | 의병전쟁 |
| 종류 | 가옥 |
| 상태 | 앞면 8칸·옆면 6칸 반 규모이며, 지붕은 옆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원래는 정침과 사당으로 이루어져 있었으나 현재는 정침만 남아 있다. 조선 효종 1년(1650)경에 세운 이 건물은 조선 중기의 건축 양식을 잘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
| 정의 | 영해의진 의병장 이수악의 태어나 살던 곳 |
관련정보
| 관련 사건 | |
|---|---|
| 관련 조직 | 영해의병(寧海義兵) |
| 관련 인물 | 이수악(李壽岳) |
| 관련 내용 |
이수악(李壽岳)은 경상북도 영덕군 창수면 오촌리(五村里)에서 태어났다. 존재(存齋) 이휘일(1619-1673)의 8대손이다. 본관은 재령, 자는 치숭(穉崇), 호는 우헌(于軒)이다. 그는 1986년 3월 24일 영해의병을 조직하고, 의병대장에 취임하였다. 영해의병은 그를 포함하여 212명의 방대한 지휘부를 구성하였다. 이를 알려주는 자료가 「등단시파록(登壇時爬錄)」이다. 이수악이 이끄는 영해의진은 조직 후 몇 차례의 전투를 치렀다. 5월 초·중순과 7월 13-14일, 그리고 8월 14일이다. 김하락의진·영덕의진과 합세하여 벌인 7월 14일 오십천 남천 숲(남천쑤)에서 영해의병은 큰 손실을 입고 흩어졌다. 그 뒤 드러나는 영해의진의 마지막 전투는 8월 14일에 있었다. 병곡면 사천에서 적의 습격을 받아 맞서 싸웠지만, 결국 영해의진은 크게 패하였고, 영병장이었던 박동진이 전사하였다. 그 뒤 영해의진은 해산한 것으로 보인다. 이수악은 만년에 존재종택과 멀지않은 우헌정(于軒亭)에 거처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3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
| 참고 문헌 |
○ 「우헌 이수악 행장」, 『우헌집』 8, 1960, 42쪽. ○ 김희곤, 『신돌석 백년 만의 귀향』, 푸른역사, 2001, 25-26쪽. ○ 김희곤 외, 『영덕의 독립운동사』, 영덕군, 2003, 90-141쪽. ○ 강윤정, 『시대를 뛰어넘은 평민의병장 신돌석』, 독립기념관, 2016, 29-31쪽. ○ 『于軒集』貞 卷8 附錄, 「遺事」‧「行狀」‧「墓碣銘」(한국국학진흥원 소장본). 「의포도안」(필사본). 「丙申(1896) 正月二十二日 집강소파록(필사본). 「창의시파록」(필사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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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정보
| 당시 주소 | 경상북도 영덕군 창수면 |
|---|---|
| 주소 | 경북 영덕군 창수면 오서로 930-17 존재종택 (오촌리 318-1) |
| 도로명 주소 | |
| 위치 고증 | 이수악은 존재 이휘일의 8대손이며, 존재종택은 현재도 원형을 유지하고 있어 위치를 확정하였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