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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별 · 작전별 사적지 현황

남자현 생가 터

기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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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적지 분류 국내항일운동사적지
운동계열분류 해외독립운동가 국내사적지
종류 가옥
상태 멸실 / 남자현의 생가는 멸실되고, 생가 근처인 영양군 석보면 지경리 394번지에 생가를 복원하였다.
정의 만주에서 의열투쟁을 전개한 남자현이 태어나 살던 집이 있었던 곳

관련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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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사건 1927.봄 길림사건/1927.4 사이토 조선총독 암살기도사건/1933.1 만주국 주재 일본 전권대사 무토 처단미수사건
관련 조직 여자교육회 
관련 인물 안창호(安昌浩)/김동삼(金東三)
관련 내용 남자현(南慈賢, 1872~1933)은 경북 영양에서 태어나 19세에 안동군 일직면 출신의 김영주(金永周)와 결혼하였다. 남편은 1896년 7월 진보면 흥구동에서 있었던 의병전투에서 전사했다. 유복자를 기르고 시어머니를 봉양하며, 평범한 여성으로 살던 남자현은 46세 때인 1919년 잠시 서울에 머물면서 3·1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가, 같은달 말 만주로 망명하였다.

만주로 망명한 이후, 50세가 되던 1920년대 중반까지 교회를 설립하고, 여자교육회를 조직하여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활동을 펼쳤다. 이후 그녀는 1927년 봄에 있었던 안창호(安昌浩)를 비롯한 독립운동가 50여 명이 나석주(羅錫疇) 의사의 추도회를 겸한 민족운동의 장래에 대해 협의하기 위해 지린[吉林]에서 집회를 열었다가 중국 관헌에게 체포되어 감옥에 갇힌 '길림사건'을 계기로 의열투쟁으로 운동노선을 바꾸었다. 이때 대한민국임시정부를 비롯한 독립운동계가 이들에 대한 구명운동에 나섰고, 남자현은 이들에 대한 옥바라지를 하는 등 이들을 적극 후원하였다.

'길림사건' 이후 의열투쟁으로 전환한 남자현은 1927년 4월 사이토 마코토[齋藤實] 조선총독을 암살하기 위해 서울로 잠입하였으며, 거사는 성공하지 못했다. 다시 만주로 돌아온 남자현은 1931년 10월 하얼빈[哈爾濱] 주재 일본총영사관에 갇혀있는 김동삼(金東三)의 구출활동을 펼쳤다.

1932년 9월에는 국제연맹조사단에 '한국독립원(韓國獨立願)'이라고 쓴 혈서 전달을 추진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1933년 1월 다시 만주국 주재 일본 전권대사 무토 노부요시[武藤信義]를 처단하려고 하였으나 계획이 발각되어 체포되었다. 하얼빈 주재 일본총영사관 감옥에서 6개월간 혹독한 형벌에 시달렸다. 단식투쟁 끝에 병보석으로 풀려났으나 1933년 8월 22일 끝내 순국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참고 문헌 『조선중앙일보』, 1933년 8월 26일, 「단식한 지 9일만에 인사불성되어 출감, 보석 출감한 武藤대장 암살범」.
『국민보』, 1959년 5월 20일, 「애국투사, 남자현 여사」.
김미옥, 「남자현」, 『안동문화』 창간호, 안동문화원, 1993, 182쪽.
김희곤 외, 『영양의 독립운동사』, 영양문화원, 2006, 35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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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정보

지역정보
당시 주소 경상북도 영양군 석보면 지경동
주소 경북 영양군 석보면 지경리 393-6
도로명 주소
위치 고증 『조선중앙일보』 1933년 8월 26일자 및 『국민보』1959년 5월 20일자 등에 관련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이병철 외 마을 사람들의 증언을 통해 위치를 확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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