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별 · 작전별 사적지 현황
장윤덕 집터
기본정보
| 사적지 분류 | 국내항일운동사적지 |
|---|---|
| 운동계열분류 | 의병전쟁 |
| 종류 | 집터 |
| 상태 | 옛 흔적은 남아있지 않다. 장윤덕이 순국하던 날 저녁 부인 김씨와 의병 동지들이 유해를 수습하여 노상동 집에 돌아오니 일본군의 방화로 기와집 8칸 전체가 불타서 없어졌다고 전한다. 현재 다른 건물이 있다. |
| 정의 | 예천의병장 장윤덕이 살던 집 |
관련정보
| 관련 사건 | 을사늑약, 갈평전투(葛坪戰鬪) |
|---|---|
| 관련 조직 | 예천의병(醴泉義兵) |
| 관련 인물 | 장윤덕(張胤德) |
| 관련 내용 |
장윤덕(張胤德, 1872-1907)은 경북 예천군 노상리에서 장재안(張載安)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안동(安東)이고, 호는 성암(惺菴)이다. 예천군 수서기(首書記)로 있던 중 1905년 을사늑약이 있자, 서기직을 그만두었다. 1907년 4월 이토(伊藤博文)와 매국대신들을 처단하고자 상경하였으나, 배신자의 밀고로 실패하고 말았다. 이어 고종황제 강제퇴위와 군대해산이 있자, 그는 각지에 격문(檄文)을 돌리고 300여 명의 의병을 규합하여, 이강년(李康秊)이 이끄는 문경의병에 합류하였다. 그 뒤 풍기・봉화・문경・예천 등지에서 헌병분파소・경찰분서 등을 공격하거나 친일 행위자 등을 처단하였다. 1907년 7월 9일 일제 경찰대와 교전하여 일본인 경찰 보조원 3명과 한인 순검 2명을 사살하고, 가옥과 가산을 불태웠으며, 8월 27일에는 의병 300명을 이끌고 풍기에 있는 일제 분파소를 공격하여 풍기읍을 장악하였다. 이어 8월 31일에도 봉화분파소를 공격하였고, 이후 문경과 예천 용궁에서 활약하였다. 1907년 9월 10일에는 이강년・민긍호 연합부대와 합세하여 문경 갈평리에서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다. 이 갈평전투(葛坪戰鬪)에서 장윤덕은 300여 명의 군사를 이끌고 이강년・민긍호와 함께 대격전을 치렀다. 이후 그는 상주를 거쳐 낙동강을 따라 대구를 점령할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1907년 9월 12일 예천읍을 공격한 후, 상주를 공격하다 그는 총상을 입고 일본군에게 붙잡히고 말았다. 4일 뒤인 16일 상주 함창면 구향리에서 총살형을 당하여 순국하였다. 그의 나이 향년 35세였다. 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에 추서되었다. |
| 참고 문헌 |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자료집』 3-의병항쟁사자료집, 1983, 573쪽.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 1-의병항쟁사, 1983, 584-585쪽. ○ 안동대학교 안동문화연구소 편, 『경북독립운동사』 Ⅰ-의병항쟁, 경상북도, 2012, 378-380쪽. ○ 김시우, 『예천의 독립운동사』, 예천문화원, 142-144쪽. ○ 「토지대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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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정보
| 당시 주소 | 경상북도 예천군 예천읍 노상동 |
|---|---|
| 주소 | 경북 예천군 예천읍 군청길 65-9 (노상리 27-1) |
| 도로명 주소 | |
| 위치 고증 | 예천읍 노상동 토지대장을 조사하여, 1914 백부 장윤정(張胤貞)과 1917년 아들 장시환(張時煥)이 소유자임을 확인하고 위치를 고증하였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