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별 · 작전별 사적지 현황
이강년의병 주둔지 및 3·1운동 만세시위지-김용사
기본정보
| 사적지 분류 | 국내항일운동사적지 |
|---|---|
| 운동계열분류 | 의병전쟁 |
| 종류 | 건물 |
| 상태 | 당시 강당은 소실되고, 새로 지어지는 등 옛 모습 그대로는 아니다. |
| 정의 | 1907년 운강 이강년 부대가 문경읍으로 진군할 때 주둔한 곳이며, 1919년 4월 11일 김용사 지방학림 학생들이 만세운동을 모의한 곳 |
관련정보
| 관련 사건 | 이강년의병 주둔, 김용사 지방학림 3.1운동 |
|---|---|
| 관련 조직 | 이강년 의병부대, 김용사 지방학림 |
| 관련 인물 | 이강년(李康秊), 전장헌(錢藏憲), 송인수(宋仁洙), 성도환(成道煥), 최덕찰(崔德察), 혜옹(慧翁), 김훈영 |
| 관련 내용 |
이강년 부대는 1907년 8월 23일 충주성 공격에서 물러나, 그 해 9월 동로를 거쳐 문경읍으로 진군할 때 김용사에 주둔하였다. 김용사에서 2박 3일 주둔하는 동안 군량확보와 인근 지역 유지들로부터 군수물자를 지원받아 이후 조령·갈평·적성전투를 지휘하였다. 그 뒤 1919년 이곳에서 3.1만세운동이 일어났다. 김용사 지방학림 학생들에게 만세운동의 불을 지핀 것은 전장헌(錢藏憲)이다. 김용사 공비생(公費生)으로 중앙학림에서 유학 중이던 그는 1919년 3월 25일 독립선언서 한 장을 구두 밑창에 숨겨 김용사에 전해주고 돌아갔다. 이를 계기로 송인수(宋仁洙)와 성도환(成道煥)은 4월 11일 만세시위를 계획하였다. 이들은 기숙사에 있던 최덕찰(崔德察) 등 십여 명에게 "4월 13일 대하리 헌병주재소 앞에 모여 조선독립만세를 부르자."고 촉구하였다. 이에 뜻을 같이한 18명의 학생들은 4월 13일 태극기 4개를 감추고, 헌병주재소가 있는 대하리로 향했다. 그러나 이들이 이곡리 석문안에 이르렀을 때 김용사 주지이자 교장이던 혜옹(慧翁) 스님이 앞을 가로막고 "알았다, 너희들의 뜻을 잘 알았으니 돌아가자."며 협박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학생들은 결국 헌병주재소까지 가지 못하고 돌아왔다. 다음날 만세운동에 나섰던 학생들은 모두 체포되었고, 그 가운데 송인수·성도환·김훈영은 재판에 회부되어 형을 받았다. |
| 참고 문헌 |
○ 『운강선생창의일록』(목판본), 1948. ○ 『운강선생문집』(목판본), 1949. ○ 『국역 운강이강년전집』청권사, 1993. ○ 박정수·강순희 편, 구완회 역, 『국역 창의사실기』, 세명대 지역문화연구소, 2014. ○ 구완회, 『영원한 의병장 운강 이강년』, 지식산업사, 2015, 178-181쪽. ○ 박민영, 『의병전쟁의 선봉장 이강년』,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15, 207쪽. ○ 정제우, 『구한말 의병장 이강년연구』, 인하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2. 송재엽, 「상주에 영면한 항일의병장 운강이강년과 광복의사단」, 『상주문화』 11, 상주문화원, 2001, 197-256쪽. ○ 김용사(1900년). ○ 「송인수 판결문」, 1919년 6월 3일, 대구복심법원. |
*좌표를 클릭하시면 '길찾기'로 연결됩니다.
지역정보
| 당시 주소 | 경상북도 문경군 조령 |
|---|---|
| 주소 | 경북 문경시 산북면 김용길 372 김용사 (김용리 410) |
| 도로명 주소 | |
| 위치 고증 | 「송인수 판결문」에 관련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김용사는 건물이 남아있어 위치를 확정하였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