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별 · 작전별 사적지 현황
이강년 생가 터
기본정보
| 사적지 분류 | 국내항일운동사적지 |
|---|---|
| 운동계열분류 | 의병전쟁 |
| 종류 | 집터 |
| 상태 | 이강년 생가의 옛 모습은 사라지고 없다. 그 자리에는 현재 집이 들어서 있다. |
| 정의 | 1896년부터 문경·제천 등지에서 의병장으로 활약한 이강년이 거주했던 곳 |
관련정보
| 관련 사건 | 백담사전투(百潭寺戰鬪), 서벽전투(西壁戰鬪), 내성전투(乃城戰鬪), 재산전투(才山戰鬪), 작성전투(鵲城戰鬪) |
|---|---|
| 관련 조직 | 호좌의병(湖左義兵), 13도 연합의병 |
| 관련 인물 | 이강년(李康秊), 류인석(柳麟錫), 민긍호(閔肯鎬) |
| 관련 내용 |
이강년(李康秊, 1858. 12. 30∼1908. 10. 13)은 1858년 12월 30일 경상북도 문경시 가은읍 도태마을에서 이기태(李起台)와 의령남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호는 운강雲岡・雲崗, 자는 낙인(樂仁・樂寅)이다. 본관은 전주이며 효령대군의 후손이다. 그는 1880년 3월 무과에 급제한 뒤, 변방에서 고을살이하던 백부를 따라다니며 견문을 넓혔다. 이때 그는 무과급제자로서 정식 관료가 되기 전 군관軍官 경력을 쌓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 뒤 선전관(宣傳官)에 천거되었다. 1896년 1월 11일 도태(道胎)장터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마고성전투에서 패한 뒤 제천 류인석이 이끌던 호좌의병(湖左義兵)에 합류하였다. 그 뒤 류인석(柳麟錫) 부대의 유격장이 되어 문경·평천·조령 등지에서 활약하였다. 1907년 4월 다시 의병을 일으킨 이강년은 민긍호(閔肯鎬)와 합세하여 충주를 공격하였다. 같은 해 12월 전국의 의병들이 서울을 공격하기 위해 양주에 모여 13도 연합으로 의병부대를 편성하자, 호서창의대장으로 의병을 이끌었다. 그러나 서울 진격작전이 이루어지지 않자, 다음 해인 1908년 봄부터 부하들을 이끌고 용소동(龍沼洞)・대청리(待淸里)・갈기동(葛基洞)에서 적과 교전하였다. 또한 백담사(百潭寺) 전투와 봉화 서벽(西壁)·내성(乃城)·재산(才山)전투 등에서 큰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1908년 6월 청풍의 까치성[鵲城]에서 벌어진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발목에 총상을 입고 일본군에게 붙잡혀 교수형으로 순국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
| 참고 문헌 |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자료집』 별집 1-의병항쟁재판기록, 1983, 466쪽. ○ 나제문화연구회, 『雲岡集』, 나제문화연구회, 2007, 542쪽. ○ 김희곤 외, 『문경의 의병과 독립운동사 연구』, 문경문화원, 2009, 41쪽. ○ 이강년. ○ 「이강년 판결문」, 경성공소원, 1908년 9월 22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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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정보
| 당시 주소 | 경상북도 문경시 가은읍 완장리 129-6 |
|---|---|
| 주소 | 경북 문경시 가은읍 대야로 1867-3 (상괴리 455-2) |
| 도로명 주소 | |
| 위치 고증 | 「이강년 판결문」에 관련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이강년의 집은 문경시에서 복원하여 경북기념물 제90호로 지정을 받았다. 그러나 최근 조사에 따르면 이강년이 태어난 집은 가은읍 대야로 1867-3 (상괴리 455-2)이다. 현재 그곳에는 <운강선생이 사시든 곳>이라는 표지석이 있으나, 원래는 <운강선생이 태어나신 곳>이라는 비석이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강년생가지 복원사업 때, 원래 생가지에 복원하기가 어려워, 집안이 대대로 살았던 현재의 장소에 생가지를 복원하면서, <운강선생이 태어나신 곳>이라는 비석을 폐기하고, <운강선생이 사시든 곳>이라는 비석으로 바꾸어 세웠다고 한다. 이는 실제 생가지에 거주하고 있는 이용수님의 증언이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