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별 · 작전별 사적지 현황
권오설 묘
기본정보
| 사적지 분류 | 등급분류 제외(항일운동) |
|---|---|
| 운동계열분류 | 사회주의 독립운동 |
| 종류 | 묘소 |
| 상태 | 권오설의 묘소는 잘 보전・관리되고 있다. |
| 정의 | 1926년 6.10만세운동을 주도한 권오설의 묘소 |
관련정보
| 관련 사건 | |
|---|---|
| 관련 조직 | |
| 관련 인물 | 권오설(權五卨) |
| 관련 내용 |
권오설(權五卨, 1897-1930)은 1897년 안동시 풍천면 가곡리에서 태어났다. 가일마을이라 불리는 이곳은 안동의 대표적인 반촌이지만, 그의 집안형편은 어려웠다. 고향에서 남명학교와 동화학교를 마치고 대구와 서울로 유학하였지만 학업을 제대로 마칠 수 없었다. 생활고를 해결하기 위해 1918년 전라남도 도청에 잠시 근무하였으나 1919년 3.1만세운동이 일어나자 곧 배후인물로 지목되어 옥고를 치렀다. 이는 그의 민족의식의 성장에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이후 권오설은 고향으로 돌아와 학술강습소를 열어 교육·계몽운동에 힘을 쏟았다. 그러나 여기에 그치지 않고 풍산소작인회를 조직하고 농민대중을 선도해 나갔다. 그 과정에서 권오설은 사회주의를 수용하고, 1925년 조선공산당을 이끄는 핵심인물이 되었다. 1925년 12월 중순 제2차 고려공산청년회 책임비서 및 조직부 책임자로 선출된 그는 6.10만세운동을 이끌었다. 권오설은 1926년 4월 말경부터 이 운동을 기획하고, 전 민족의 참여를 이끌어 내기 위해 통일전선체 조직에 나섰다. 그 결과 천도교와 조선공산당, 학생층 등 다양한 주체들이 정치적 이념을 초월하여 통일전선을 형성하였다. 비록 만세 직전 일경에게 체포되어 6.10만세운동에 참여하지는 못했지만 그 뜻에 동참했던 민족지성들은 만세운동을 펼쳤다. 체포된 권오설은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다 1930년 4월 17일 끝내 순국하였다. 2005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
| 참고 문헌 |
○ ○ 국회도서관, 『왜정시대인물사료』 1, 1983, 137-138쪽. ○ ○ 장석흥, 「권오설의 민족운동 노선과 성격」, 『한국근현대사연구』 19, 한울, 2001, 209쪽. 안동청년유도회, 『권오설 선생 추모학술강연회』, 안동청년유도회, 2005. ○ 『조선일보』, 1930년 4월 19일, 「제1차 공산당 권오설 옥사」. ○ 「권오설 철관」(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 전시). ○ 「권오설 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 국사편찬위원회 소장본.. 「신문조서」. 「권오설의 아버지가 죽은 아들에게 쓴 제문(1932년 3월 19일)」, 후손 권대용 소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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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정보
| 당시 주소 | 경상북도 안동군 풍서면 가곡동 |
|---|---|
| 주소 | 경북 안동시 풍천면 가곡리 347 |
| 도로명 주소 | |
| 위치 고증 | 묘소에 묘비 및 기념물이 있으며, 후손 권대용을 통해 위치를 확인하였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