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별 · 작전별 사적지 현황
류림 집터
기본정보
| 사적지 분류 | 국내항일운동사적지 |
|---|---|
| 운동계열분류 | 사회주의 독립운동 |
| 종류 | 집터 |
| 상태 | 류림의 집은 멸실되고, 현재 밭으로 활용되고 있다. |
| 정의 |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활약한 아나키스트 류림이 살던 집이 있던 곳 |
관련정보
| 관련 사건 | 편항시장(鞭巷市場) 3.1운동 |
|---|---|
| 관련 조직 |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 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朝鮮無政府主義者聯盟), 대한민국 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 |
| 관련 인물 | 류림(柳林), 김좌진(金佐鎭), 신채호(申采浩) |
| 관련 내용 |
류림(柳林, 본명 華永, 1894-1961)은 경북 안동 출신이며, 호는 단주(旦州)이다. 그는 협동학교를 졸업하고, 1915년부터 대구에서 부흥회와 자강회를 조직하여 항일 운동을 펼쳤다. 1919년에는 안동의 편항시장(鞭巷市場)에서 일어난 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그 뒤 만주로 망명하여 서로군정서 특파원으로 활동하던 류림은 1920년 활동무대를 다시 상해로 옮겼다. 이 무렵 상해와 북경을 오가며 신채호(申采浩)와 교유하면서 아나키즘에 눈을 떴다. 류림은 1922년 중국의 성도(成都)로 유학하여 영문학을 전공하며, 프랑스어와 에스페란토어 등을 공부하였다. 1926년 초, 대학을 마치고 만주로 돌아온 류림은 김좌진(金佐鎭)과 공동노선을 모색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1929년 10월 23일 평양에서 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을 결성한 그는 아나키즘 운동을 이끌었다. 이 과정에서 1931년 10월에 붙잡혀 5년형을 선고받고, 1937년 10월까지 6년의 긴 옥살이를 겪었다. 출옥 후 류림은 다시 망명길에 올랐다. 연안을 거쳐 중경으로 건너간 그는 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 대표로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참여하였다. 1942년 10월 20일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선출되었으며, 1942년 2월부터 외교위원회 연구위원, 선전위원회의 위원으로 활약하였다. 1944년 4월부터는 국무위원으로 활약하였다. 해방을 맞아 임시정부 요인으로서 환국(還國)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
| 참고 문헌 |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자료집』 11-의열투쟁사자료집, 1983, 816-822쪽. ○ 김희곤, 「단주 유림의 독립운동」, 『한국근현대사연구』 18, 한울, 2001, 69쪽. ○ 대한민국 임시정부 환국기념. ○ 「류림 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 국사편찬위원회 소장본.. 「류화영 판결문」, 경성복심법원, 1933년 5월 11일. 「류화영 판결문」, 고등법원형사부, 1933년 7월 6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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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정보
| 당시 주소 | 경상북도 안동군 예안면 계곡동 542 |
|---|---|
| 주소 | 경북 안동시 예안면 계일길 112 (계일길 112와 118 사이길 건너 안동댐 수몰지구 / 계곡리 옛 542) |
| 도로명 주소 | |
| 위치 고증 | 「판결문」과 「류림 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에 관련 사실과 번지가 기록되어 있다. 자료상 주소와 마을 사람들의 증언이 일치하여 위치를 확인하였으나 안동댐으로 인해 지번은 없어졌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