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별 · 작전별 사적지 현황
김동삼 생가
기본정보
| 사적지 분류 | 국내항일운동사적지 |
|---|---|
| 운동계열분류 | 해외 독립운동가 |
| 종류 | 가옥 |
| 상태 | 김동삼 생가는 외형이 많이 바뀌었으나, 일부 구조는 그대로이다. |
| 정의 | 만주로 망명하여 백서농장·서로군정서·정의부 등에서 활약한 김동삼이 태어난 곳 |
관련정보
| 관련 사건 | 간도참변, 국민대표회의, 만주사변 |
|---|---|
| 관련 조직 | 협동학교(協東學校), 신민회(新民會), 대동청년당(大同靑年黨), 백서농장(白西農庄),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 남만통일회(南滿統一會), 통군부(統軍府), 통의부(統義府), 정의부(正義府), 민족유일당운동촉성회(民族唯一黨運動促成會) |
| 관련 인물 | 김동삼(金東三), 이상룡(李相龍), 한용운(韓龍雲) |
| 관련 내용 |
일송 김동삼(金東三, 본명 肯植, 1878-1937)은 임하면(臨河面) 천전리(川前里)에서 태어났다. 1907년부터 협동학교와 신민회, 대동청년단에서 애국계몽운동을 펼쳤으며, 대한제국이 멸망하자, 만주로 망명하였다. 1911년 삼원포(三源浦)에 정착한 김동삼은 경학사 사장 이상룡(李相龍)을 도와 독립운동기지 건설에 힘을 쏟았다. 1914년에는 백서농장(白西農庄)의 장주가 되었으며, 1919년 서로군정서 참모장에 취임하였다. 1922년 6월, 간도참변으로 무너진 동포사회와 독립군을 추슬러 남만통일회(南滿統一會)를 주도하고, 통군부(統軍府)를 탄생시켰다. 8월 30일 통군부가 통의부(統義府)로 확대 개편되자, 총장이 되어 이를 이끌었다. 1923년 1월, 상해에서 국민대표회의가 열리자 서로군정서 대표로 참여하였다. 이 회의에서 의장으로 선출된 그는 독립운동단체 통합에 힘썼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만주로 돌아왔다. 그 뒤 정의부와 민족유일당운동촉성회를 이끌며, 독립운동 단체의 통일에 힘을 기울였다. 만주사변이 일어나자 북만주에서 활동을 모색하던 김동삼은 1931년 10월 하얼빈에서 체포되었다. 그는 10년형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다 1937년 4월 13일 옥중에서 순국하였다. 만해(萬海) 한용운(韓龍雲)이 그의 시신을 거두어 장례를 지냈다. 유언대로 화장하여 한강에 그 유해를 뿌렸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
| 참고 문헌 |
○ 김희곤, 『만주벌 호랑이 김동삼』, 지식산업사, 2009, 20·214-215쪽. ○ 『동아일보』, 1932년 12월 25일, 2면 1단, 「海外兩大民族團體 兩委員長公判開廷」. 『독립신문』, 1923년 1월 31일, 「金東三氏가議長」. ○ 김동삼. 협동학교 교직원. ○ 「김동삼 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 국사편찬위원회 소장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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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정보
| 당시 주소 | 경상북도 안동군 임현내면 천전동 278 |
|---|---|
| 주소 | 경북 안동시 임하면 내앞길 7-7 (천전리 278) |
| 도로명 주소 | |
| 위치 고증 | 「김동삼 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에 관련 사실과 주소가 기록되어 있다. 이를 근거로 위치를 확정하였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