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별 · 작전별 사적지 현황
이기찬 집터
기본정보
| 사적지 분류 | 국내항일운동사적지 |
|---|---|
| 운동계열분류 | 의병전쟁 |
| 종류 | 집터 |
| 상태 | 옛 흔적은 사라지고 현재는 밭이 되었다. |
| 정의 | 이기찬이 1896년 김산의병장으로 활동할 당시 살았던 집 |
관련정보
| 관련 사건 | |
|---|---|
| 관련 조직 | |
| 관련 인물 | 이기찬(李起燦) |
| 관련 내용 |
이기찬(李起燦, 1853-1908)은 경북 청송군 서덕(西德)에서 태어나, 9세 때(1861년) 부친 이태효(李泰孝)를 따라 군위 나호(羅湖)로 옮겨갔다. 이곳에서 학문에 정진하여 유학자로 명망이 높았다. 37세가 되던 1889년 다시 상주 화서 금천(錦川)으로 옮겼다. 1895년 전국에서 의병이 일어나자, 이기찬은 1896년 3월 23일(음 2.10)은 허성산(許盛山)・강석포(姜石圃)・양벽도(梁碧燾)・김봉초(金鳳超) 등 수십 명을 이끌고 김천으로 갔다. 우여곡절 끝에 3월 24일(음 2.11) 김산・개령・지례・상주・선산 등지의 유생들과 연합하여 금릉향교에서 김산의진(金山義陣)을 꾸리고, 대장으로 추대되었다. 이기찬은 조동석을 군문도총(軍門都摠)에, 강무형을 찬획(贊劃)에, 허위를 참모장(參謀將)에 선임하여 진용을 갖춘 후 대구부(大邱部) 진공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미처 진용이 완비되기 전에 관군이 출동하는 바람에 의병들은 흩어지고 말았다. 그 뒤 금릉·구성·협천·영동·화북·문경 일대에서 의병을 지휘하던 이기찬은 5월 16일(음 4.4) 대장직에서 물러나, 상주로 돌아왔다. 이듬해 충북 보은군 문의면으로 거처를 옮겼다. 후진양성에 힘쓰다가 1908년 1월 13일 56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1993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
| 참고 문헌 |
○ 이기찬, 「창의일기」, 『지산유고』 3, 2월 10일(필사본).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 1-의병항쟁사, 1983, 243-244쪽. ○ 안동대학교 안동문화연구소 편, 『경북독립운동사』 Ⅰ-의병항쟁, 경상북도, 2012, 252-267쪽. ○ 김철수, 『상주의 항일독립운동』, 상주문화원, 2016, 131-133쪽. ○ 강경모, 「조선후기 상주지역 의병활동-지산 이기찬 창의일록을 중심으로」, 『상주 문화연구』 13, 상주대학교 상주문화연구소, 2003, 83-115쪽. ○ 이강하, 「지산이선생연보」・「家狀」(필사본), 1931, 1-4・11-15쪽. 「이기찬 독립유공자공훈록」, 국가보훈처 공훈전자사료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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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정보
| 당시 주소 | 경상북도 상주 화서 금천(錦川) |
|---|---|
| 주소 | 경북 상주시 화서면 금산갑방길 104-5 (금산리 317) |
| 도로명 주소 | |
| 위치 고증 | 『지산유고』의 「지산이선생연보」와 「가장(家狀)」에 관련 사실이 기록되어 있으며, 족손인 이영규의 증언을 토대로 위치를 확정하였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