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별 · 작전별 사적지 현황
안동의병 전투지-태봉
기본정보
| 사적지 분류 | 국내항일운동사적지 |
|---|---|
| 운동계열분류 | 의병전쟁 |
| 종류 | 산야 |
| 상태 | 봉우리는 남아있으나 주위가 논으로 변하였다. |
| 정의 | 1894년 안동의병이, 1896년 안동·호좌의병 등 7개 연합의병이 일본군과 전투를 치른 곳 |
관련정보
| 관련 사건 | 갑오변란 |
|---|---|
| 관련 조직 | 안동의병(安東義兵), 호좌의병(湖左義秉), 영주의병(榮州義兵), 순흥의병(順興義兵), 선성의병(宣城義兵), 풍기의병(豊基義兵), 봉화의병(奉化義兵) |
| 관련 인물 | 김도현(金道鉉), 서상철(徐相轍) |
| 관련 내용 |
함창 태봉(胎封, 台峰)은 1894년 안동의병과 1896년 3월 29일 안동·호좌의진 등 7개 연합의병이 전투를 치른 곳이다. 1894년 일본군이 경복궁을 점령한 갑오변란이 있자, 제천 유생 서상철(徐相轍)은 안동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8월 초에 이르러 2천여 명이 참여한 안동의병이 결성되었다. 9월 1일 600여 명의 의병은 일본군 병참부대가 있는 태봉을 공격하였다. 그러나 일본군 제6사단 토고[藤後] 소위가 이끄는 공병대 25명의 반격을 받고, 의병측은 다수의 부상자를 내고 물러났다. 1896년 3월 29일 안동·호좌의진 등 7개 연합의진은 다시 태봉을 공격하였다. 3월 26일 문경 산양장터에서 안동을 비롯한 풍기·순흥·영주·봉화·선성·호좌의진으로 이루어진 연합의진이 이루어졌다. 연합의진은 3월 28일 공격을 위해 주변 지역에 분산하였는데, 안동의진은 덕통역(德通驛), 호좌의진은 함창, 영주·순흥·선성의진은 포내촌(浦內村), 풍기의진은 당교, 봉화의진은 동산촌(東山村)에 각각 머물렀다. 3월 29일 아침 연합의진은 공격을 시작하였다. 김도현(金道鉉)은 「창의전말」에서 당시의 전투상황을 "태봉을 향해 가는데, 한 기다란 시내가 있고 커다란 들이 나 있다. 혹 산에 올라 멀리 바라보기도 하고, 혹 길을 물어 후군을 기다리기도 한다. 오직 선성의진이 앞에 섰고, 풍기·영주·순흥 3진은 뒤에 따라 들을 덮고 나간다."고 기록하였다. 아침부터 시작된 전투는 저녁 무렵 일본군의 총공격으로 연합의진의 패배로 끝났다. 이후 연합의진은 29일 밤 예천으로 후퇴하였다가, 출신지로 각각 흩어졌다. |
| 참고 문헌 |
○ 조선총독부, 『近世韓國五萬分之一地形圖(1914-1918)』, 경인문화사, 1998, 195쪽.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자료집』 2-의병항쟁사자료집, 1983, 23-24쪽. ○ 김희곤·권대웅 편, 『한말의병일기』, 국가보훈처, 2003, 143-146쪽. ○ 김희곤, 『안동 사람들의 항일투쟁』, 안동독립운동기념관, 2007, 115-122쪽. ○ 『벽산선생창의전말』. ○ 권대웅, 「乙未義兵期 慶北 北部地域의 禮泉會盟」, 『민족문화논총』 14, 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1993, 71-73쪽. 김상기, 「1895-1896년 安東義兵의 思想的 淵源과 抗日鬪爭」, 『사학지』 31, 단국 사학회, 1998, 317-324쪽. ○ 『독립신문』, 1896년 4월 30일, 2면 3단, 「안동 관찰사」. ○ 「日軍의 安東民家 放火事件(千餘戶 全燒) 에 대한 解明」, 『주한일본공사관기록』 9,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함창 태봉(1872년 지방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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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정보
| 당시 주소 | 경상북도 함창군 현내면 태봉리 태봉 |
|---|---|
| 주소 | 경북 상주시 함창읍 태봉리 109-1 일대 |
| 도로명 주소 | |
| 위치 고증 | 김도현의 「벽산선생창의전말」과 이긍연의 「을미의병일기」에 관련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태봉은 현재도 그 지명이 남아있고, 「함창 태봉(1872년 지방도)」・『近世韓國五萬分之一地形圖』를 통해 위치를 확인하였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