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별 · 작전별 사적지 현황
경주장터 3·1운동 만세시위지
기본정보
| 사적지 분류 | 국내항일운동사적지 |
|---|---|
| 운동계열분류 | 3·1운동 |
| 종류 | 기타(시장) |
| 상태 | 현재는 시장은 멸실되었고 봉황대와 금관총 사이에 봉황로라는 길이 나있다. 일부는 상가가 형성되어 있다. |
| 정의 | 1919년 3월 15일 경주읍 장날을 이용하여 만세시위를 펼친 곳 |
관련정보
| 관련 사건 | 3.1운동 |
|---|---|
| 관련 조직 | 노동리 교회 |
| 관련 인물 | 김기원(金基源), 김억근(金億根), 박래영(朴來英), 박무훈(朴茂勳), 박문홍(朴文泓), 박봉록(朴鳳綠), 서봉룡(徐鳳龍), 윤기효(尹琪孝), 최성렬(崔聖烈) |
| 관련 내용 |
1919년 3월 9일 경산군 고산면 사월리 기독교 목사 김기원(金基源)이 경주군 노동리교회의 영수인 박문홍(朴文泓)에게 3월 8일 전개된 대구 만세운동 소식을 전하면서 구체화되었다. 박문홍은 목사 박래영(朴來英)·영수 윤기효(尹琪孝) 등 5-6명과 함께 3월 11일과 12일 이틀에 걸쳐 노동리교회에서 모임을 갖고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협의하였다. 그 결과 이들은 3월 13일 경주 큰 장날을 이용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하는 한편, 12일 밤 박문홍의 집에서 작은 태극기 360기를 제작하였다. 3월 13일 새벽 곳곳에 태극기를 배포하던 중, 일제의 경계망에 포착되면서 3월 13일 새벽 4대로 편성된 경주경찰서 기동대에 의해 만세주동자들이 체포되었다. 박래영은 거사를 불과 몇 시간 앞두고 일제 경찰에 붙잡혔으며, 3월 13일의 읍내 장터에서의 만세시위도 불발에 그치고 말았다. 그러나 읍내 작은 장날인 3월 15일 오후 3시 30분 박봉록(朴鳳綠)·서봉룡(徐鳳龍)·박무훈(朴茂勳)·최성렬(崔聖烈)·김억근(金億根) 등 청년 30여 명이 주도하여 박문홍의 집에서 제작한 태극기를 앞세우고 노동리 봉황대(鳳凰臺) 아래에서 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
| 참고 문헌 |
○ 경상북도경찰부, 『고등경찰요사』, 1934, 39-40쪽. ○ 김정명, 『조선독립운동』 Ⅰ, 동경;원서방, 1967, 366·371·376쪽.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 3-3·1운동사(하), 1983, 442-443쪽. ○ 조선총독부, 『近世韓國五萬分之一 地形圖』(1914-1918), 경인문화사, 1998, 153쪽. ○ 조선총독부, 『生活狀態調査(其七) 慶州郡』, 1934, 498·499쪽. ○ 안동대학교 안동문화연구소 편, 『경북독립운동사』 Ⅲ-3·1운동, 경상북도, 2013, 454-456쪽. ○ 慶州附近古蹟安內와 慶州邑內市街略地圖 ○ 「박문흥 등 판결문」, 대구지방법원 경주지청, 1919년 4월 15일. 「박문홍 수형인명부」. 「박문홍 집행원부」. 「박문홍 형사사건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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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정보
| 당시 주소 | 경상북도 경주군 경주읍 장터(봉황대) |
|---|---|
| 주소 | 경북 경주시 노동동 261 봉황대 일대 |
| 도로명 주소 | |
| 위치 고증 | 「박문홍 등 판결문」과 『生活狀態調査(其七) 慶州郡』에 장소에 대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경주 중심부에 부내장(부내장, 2·7일장)과 사정장(沙正場, 4·9일장)이 있었고, 남문 밖 봉화대 일대에 작은 장(4·9일장)이 있었다고 한국학중앙연구원 인류학박사인 아라키 준이 증언해 주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