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별 · 작전별 사적지 현황
최세윤 집터
기본정보
| 사적지 분류 | 국내항일운동사적지 |
|---|---|
| 운동계열분류 | 의병전쟁 |
| 종류 | 집터 |
| 상태 | 현재 새로운 집이 지어지고 있다. |
| 정의 | 1907년 산남의병에서 활동한 최세윤이 살던 곳 |
관련정보
| 관련 사건 | 의성전투 |
|---|---|
| 관련 조직 | 산남의병(山南義兵) |
| 관련 인물 | 최세윤(崔世允), 정환직(鄭煥直), 정용기(鄭鏞基) |
| 관련 내용 |
최세윤(崔世允, 1867~1916)은 호(號)가 농고(農膏), 자(字)는 성집(聖執 또는 成執)이며, 이명은 세한(世翰)이다. 그는 한학을 수학하였으며, 병서도 즐겨 읽었다. 1894년 동학농민군에 대항하여 부하 3백 명을 이끌고 활약하였다. 최세윤은 1896년 안동의병의 아장(亞將)으로 참여한 바 있었고, 나아가 1906년 3월 창의한 산남의병의 결성 초기부터 정용기(鄭鏞基)·정환직(鄭煥直) 부자를 도와 청하(淸河)·흥해(興海) 등지에서 큰 전과를 올렸다. 1907년 9월 1일 입암전투에서 창의장 정용기가 전사한 뒤, 산남의병을 이끌던 정환직이 1907년 12월 체포되어 순국하였다. 1908년 2월 부장 이세기(李世紀)·정순기(鄭純基) 등의 추대로 최세윤은 산남의병의 본대가 머물고 있던 보현산 거동사(巨洞寺)에 도착하여, 3월 산남의병의 제3대 대장으로 취임하였다. 최세윤은 대장으로 취임하자마자 북상계획을 중단하고 지역분대의 정예화를 서둘렀다. 그리고 동해안 지역과 청송군 일대에서 일본 군경의 초토화 작전에 대응하여 지형·지세를 이용한 소부대 단위의 유격전을 전개하여 경북 흥해·청하·청송·영천 등에서 많은 전과를 올렸다. 그러나 의성전투에서 패하여 피신해 있던 중 청하헌병대에 체포되어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10년형을 언도받고 경성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던 중 단식 투쟁으로 1916년 8월 9일 순국하였다. 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
| 참고 문헌 |
○ 조동걸, 「자료Ⅱ 산남창의지(하)」 『한국독립운동사연구』 4,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1990, 577-579쪽. ○ 최세윤, 『農皐實記』, 共和出版社, 1978, 172쪽. ○ 권영배, 「산남의진(1906~1908)의 조직과 활동」, 『역사교육논집』 16, 역사교육학회, 1991, 158-162쪽. ○ 포항시편찬위원회, 『포항시사』 상, 포항시, 1999, 370쪽. ○ 조인호 외, 『영천의 독립운동사』, 영천항일독립운동선양사업회, 2013, 96-99쪽. ○ 배용일, 「최세윤 의병장고」, 『사총』 31, 역사학연구회, 1987, 52쪽. 최성원, 「農皐 崔世允의 생애와 의병활동」, 동국대학교, 2009. ○ 「최세윤 판결문」, 대구지방재판소, 1911년 11월 15일. 「최세윤 판결문」, 대구공소원, 1911년 12월 12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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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정보
| 당시 주소 | 경상북도 영일군 의창면 중성동 |
|---|---|
| 주소 | 경북 포항시 북구 흥해읍 한동로87번길 16 (중성리 160) |
| 도로명 주소 | |
| 위치 고증 | 「산남창의지」와 『農皐實記』에 관련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2010년 「제적등본」과 후손 최영직의 증언, 김기종(65세)의 증언을 통해 위치를 확인하였고, 2018년 재확인하였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