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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남의병 전투지-죽장면 입암

기본정보

기본정보
사적지 분류 국내항일운동사적지
운동계열분류 의병전쟁
종류 산야
상태 도로가 나 있으며, 일부가 변형되어 있다.
정의 1907년 9월 산남의병이 일본군을 맞아 전투를 치르다 정용기·손영각·이한구 등이 순국한 곳

관련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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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사건 입암전투
관련 조직 산남의병(山南義兵) 
관련 인물 정용기(鄭鏞基), 정환직(鄭煥直), 권규섭(權奎燮), 김일언(金一彦), 우재룡(禹在龍), 이세기(李世基), 손영각(孫永珏), 이한구(李韓久)
관련 내용 1907년 8월 26일(양력 10.3) 산남의병(山南義兵) 대장 정용기(鄭鏞基)는 관동(關東)으로 북상하여 서울진공작전에 참여하기 위해 본진 선발대 100여 명을 거느리고 영일군 죽장면(竹場面) 매현(梅峴)에 주둔하고 있었다. 이때 일본군 청송수비대가 입암(立巖)으로 들어왔다는 정보를 입수하였다. 정용기는 우재룡(禹在龍)·김일언(金一彦)·이세기(李世基) 세 부장을 각기 길목에 매복시키고, 자신의 본대는 9월 1일(양력 10.7) 새벽에 입암을 기습 공격하여 적을 섬멸하기로 하였다.

세 부장은 미리 정한 매복 장소로 이동하던 중, 안동권씨 문중 재실인 영모당(永慕堂)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던 일본군을 발견하고 선제공격을 하였으나 잠복하고 있던 일본군의 포위 공격을 받았다. 이때 매현에 주둔하고 있던 정용기는 갑작스런 포성을 듣고 밤중에 입암으로 진군하여 일본군과 새벽까지 전투를 치렀다.

1907년 9월 1일 밤 9시 30분경부터 9월 2일 새벽 2시경까지 벌어진 입암전투에서 정용기 대장을 비롯한 이한구(李韓久)·손영각(孫永珏)·권규섭(權奎燮) 등 19명의 장령들이 전사하였고, 일본군 청송수비대는 30여 명 중 2명이 부상을 당했다. 이로써 산남의병의 지휘부는 무너지고 정용기의 아버지 정환직(鄭煥直)이 달려와 남은 의진을 수습하여 인솔하였다.
참고 문헌 ○ 조동걸, 「자료Ⅱ 산남창의지(하)」 『한국독립운동사연구』 4,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1990, 592-593쪽.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자료집』 3-의병항쟁사자료집, 1983, 398쪽.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 1-의병항쟁사, 1983, 580쪽.
○ 포항시사편찬위원회, 『포항시사』 상, 포항시, 1999, 367-369쪽.
○ 조인호 외, 『영천의 독립운동사』, 영천항일독립운동선양사업회, 2013, 84-86쪽.
○ 권영배, 「산남의진(1906~1908)의 조직과 활동」, 『역사교육논집』 16, 역사교육학회, 1991, 148-149쪽.
○ 『산남창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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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정보

지역정보
당시 주소 경상북도 영일군 죽장면 입암
주소 경북 포항시  북구 죽장면 입암리 산25 일대
도로명 주소
위치 고증 「산남창의지」(하)에 관련 사실이 기재되어 있다. 2010년 포항시사편찬위원회 위원장 배용일(포항대학 초빙교수)의 증언을 통해 위치를 확인한 바 있으며, 2018년 그 위치를 다시 확인하는 과정에서 입암리 출신의 권영건(權寧建, 73세, 대구 본리동 거주)으로부터 영모당과 주막집 터를 추가로 확인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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