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별 · 작전별 사적지 현황
장진홍 생가 터
기본정보
| 사적지 분류 | 국내항일운동사적지 |
|---|---|
| 운동계열분류 | 의열투쟁 |
| 종류 | 집터 |
| 상태 | 장진홍의 집은 없어졌고 현재는 나래공원이다. |
| 정의 | 1927년 10월 조선은행 대구지점을 폭파하려 한 장진홍이 태어난 곳 |
관련정보
| 관련 사건 |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의거 |
|---|---|
| 관련 조직 | 조선보병대(朝鮮步兵隊), 광복단(光復團) |
| 관련 인물 | 장진홍(張鎭弘) |
| 관련 내용 |
장진홍(張鎭弘, 1895∼1930)은 1914년 조선보병대(朝鮮步兵隊)에 입대하고, 1916년 제대한 뒤 비밀항일결사인 광복단(光復團)에 입단하였다. 또 1918년 이국필(李國弼)과 같이 하바로프스크로 가서 그곳 교포청년들을 규합, 군사훈련을 실시하였다. 1919년 귀국한 그는 3.1운동 당시 전국을 다니며 일제 만행 자료를 수집·정리하고, 그 진상을 세계에 알리고자 같은 해 7월 인천에 입항한 미국군함에서 일하던 김상철(金相哲)에게 이를 번역하여 각국에 배포할 것을 부탁하였다. 이후 그는 부산에서 조선일보지국을 경영하였으며, 1925년에는 북경에서 잠입한 이정기(李定基)를 만나기도 하였다. 1927년 4월 장진홍은 일제의 고관과 중요시설 파괴를 목적으로 폭탄을 제조, 먼저 대구에서 거사하기로 하고, 목표를 경상북도지사·경상북도경찰부·조선은행지점·식산은행 지점 등 네 곳으로 정하였다. 10월 18일 그는 대구 덕흥여관의 종업원 박노선(朴魯善)을 시켜 폭탄이 든 나무상자 4개를 배달토록 하였다. 박노선은 폭탄을 우선 조선은행 대구지점에 전달하였다. 그러나 상자 속에서 화약냄새가 나는 것을 의심한 은행원이 도화선을 차단함으로써 실패하였고 길 옆에 두었던 3개가 차례로 폭발하여 일제경찰 여러 명이 중상을 입었고 은행건물 유리창이 파괴되었다. 장진홍은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1928년 안동과 영천에서 다시 거사를 도모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이후 경찰의 경계망을 뚫고 일본 오사카[大阪]에 사는 동생 장의환(張義煥) 집에 은신하였다. 그러나 1929년 은신처가 드러나는 바람에 잡혔다. 1930년 그는 대구지방법원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상고하였으나, 또다시 사형이 선고되자 서대문형무소에서 자결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
| 참고 문헌 |
○ 경상북도경찰부, 『고등경찰요사』, 1934, 319-322쪽. ○ 김의환, 「장진홍의 생애와 그의 의열투쟁」, 『대구사학』 12·13, 대구사학회, 1977, 288쪽. ○ 『동아일보』, 1930년 2월 18일, 2면 1단, 「대구폭탄사건판결」. ○ 「장진홍 판결문」, 고등법원, 1930년 7월 21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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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정보
| 당시 주소 | 경상북도 칠곡군 인동면 옥계동 352 |
|---|---|
| 주소 | 경북 구미시 옥계동 884 나래공원 |
| 도로명 주소 | |
| 위치 고증 | 「장진홍 판결문」에 관련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장진홍 판결문」과 증손자 장상묵의 증언을 통해 위치를 확인한 바 있으며, 2018년 재확인하였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