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별 · 작전별 사적지 현황
결심대 의거 모의지-원당보, 웅굴매기
기본정보
| 사적지 분류 | 국내항일운동사적지 |
|---|---|
| 운동계열분류 | 기타(징용·징병거부) |
| 종류 | 기타(산야) |
| 상태 | 웅굴매기는 현재 복개도로가 되어 당시 모습을 확인할 수 없다. 세 번째 모의장소인 원당보는 당시의 모습이 부분적 변형되었지만 위치를 확인할 수 있다. |
| 정의 | 결심대 2차·3차 의거 모의장소인 웅굴매기와 원당보 |
관련정보
| 관련 사건 | 일제의 징용·징병 결사반대 투쟁 |
|---|---|
| 관련 조직 | |
| 관련 인물 | 김위도(金渭道), 김인봉(金仁鳳), 김임방(金任方), 박재달(朴在達), 박재천, 성상룡(成相龍), 최동식(崔東植), 최외문(崔外文) |
| 관련 내용 | 「대왕산죽창의거공적개요(大王山竹槍義擧功績槪要)」(이하 공적개요)에 의하면 모두 세 차례의 논의과정이 있었다. 이 기록을 바탕으로 탈출 논의 과정을 살펴보면, 첫 모임은 1944년 7월 5일에 있었다. 박재달(朴在達)·박재천·김인봉(金仁鳳)·성상룡(成相龍)·최동식(崔東植)은 마을에서 그리 멀지 않은 참외밭 원두막에서 동지규합 방법을 논의했다. 사흘 뒤인 7월 8일, 속칭 웅굴매기(사월길 14-9 앞 복개도로)로 불리는 곳에서 두 번째 모임을 가졌다. 여기에는 1차 모임에 참여한 사월리 청년들과 산양리(山陽里)의 김임방(金任方), 송내리(松內里)의 김위도(金渭道), 남곡리(南谷里)의 최외문(崔外文)이 자리하였다. 마지막 논의는 7월 15일 밤 9시경 원당보에서 있었다. 여기에는 의거 관련자 29명이 모두 참석하게 되는데, 최종 인원이 집결한 만큼 주요 안건들을 논의하는 자리였다. 바로 탈출 후 생활할 은거지와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일경과 맞설 방법 등을 정하는 것이었다. |
| 참고 문헌 |
○ 경산시지편찬위원회, 『경산시지』, 경산시, 2000, 278-281쪽. ○ 권대웅, 「일제강점기 경산의 민족운동」, 『경산의 역사』, 경산문화원, 2015. ○ 『조선검찰요보』 8권 10월호(1944)-1,2 ○ 장성욱, 「일제 말기 慶山 ‘決心隊’의 강제동원 거부투쟁」, 『한국독립운동사연구』 47,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14, 124-125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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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정보
| 당시 주소 | |
|---|---|
| 주소 | 경북 경산시 남산면 사월길 14-9 앞 복개도로 (웅굴매기) |
| 도로명 주소 | |
| 위치 고증 | 광복회 경산청도연합지회장 최용근(최동식의 아들)의 증언으로 확인하였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