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별 · 작전별 사적지 현황
신녕공립보통학교 3·1운동 만세시위지
기본정보
| 사적지 분류 | 국내항일운동사적지 |
|---|---|
| 운동계열분류 | 3·1운동 |
| 종류 | 건물 |
| 상태 | 신녕초등학교로 바뀌었다. 신녕초등학교 역사관에서 그 모습을 확인할 수 있는 사진을 확인할 수 있었다. |
| 정의 | 1919년 3월 신녕면 3.1만세운동을 주도한 신녕공립보통학교가 있던 곳 |
관련정보
| 관련 사건 | 3.1운동 |
|---|---|
| 관련 조직 | |
| 관련 인물 | 박필환(朴弼煥), 구위준(具渭俊), 김준운(金俊運), 김호용(金浩溶), 박칠성(朴七星), 이석형(李錫瀅), 조율이(曹葎伊), 황응두(黃應斗), 황정수(黃正秀) |
| 관련 내용 |
1919년 3월 16일 신녕공립보통학교 교사 박필환(朴弼煥) 등이 졸업생 이성백 등을 학교 운동장에 모아 놓은 왕산동과 매양동에 살고 있던 학생 20~30명에게 "조선독립만세 고창"을 독려하였다. 3월 26일 완전동 포교소와 화성동 주재소 앞에서 신녕공립보통학교 교사 박필환과 이석형(李錫瀅), 그 친구 황응두(黃應斗)가 만세를 불렀다. 4월 6일 오후 1시, 65세의 북장로파 신자 김준운(金俊運)이 신녕공립보통학교 학생들과 만나 8일 신녕시장에서 만세시위운동을 벌이기로 약속하였다. 신녕공립보통학교 학생들은 이 소식을 접한 후 완전동 노영수의 집에서 학생 황정수(黃正秀)·김호용(金浩溶)·박칠성(朴七星)·구위준(具渭俊)이 태극기를 준비하고 만세를 불렀으며, 그날 밤 11시 30분 조율이(曹葎伊)와 신녕공립보통학교 학생 20여 명이 매양동 동쪽 천변에서 만세시위를 벌였으나 경찰에 의해 해산되고 18명이 검거되었다. |
| 참고 문헌 |
○ 안동대학교 안동문화연구소 편, 『경북독립운동사』 Ⅲ-3·1운동, 경상북도, 2013, 87-90쪽.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 3-3·1운동사(하), 1983, 336-337쪽.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자료집』 5-3·1운동재판기록, 1983, 1290-1293쪽. ○ 조인호 외, 『영천의 독립운동사』, 영천항일독립운동선양사업회, 2013, 195-206쪽. ○ 신녕초등학교(1934년), 『신녕초등 백년사』 34쪽. 신녕초등학교 초기 전경, 『신녕초등 백년사』 34쪽. 신녕초등학교(1934년), 『신녕초등 백년사』 35쪽. ○ 「박필환 판결문」, 대구지방법원, 1919년 5월 12일. 「박필환 판결문」, 대구복심법원, 1919년 6월 19일. 「김호용 외 판결문」, 대구지방법원, 1919년 5월 10일. 「김준운 판결문」, 대구지방법원, 1919년 4월 30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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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정보
| 당시 주소 | 경상북도 영천군 신녕면 화성동 |
|---|---|
| 주소 | 경북 영천시 신녕면 큰골길 9 신녕초등학교 (화성리 714) |
| 도로명 주소 | |
| 위치 고증 | 「판결문」에서 고증하였다. 신녕초등학교 역사관에서 1회 졸업생 김진린(김법린의 본명)을 확인할 수 있었고, 개축된 상황이다. 또한 신녕공립보통학교의 초기 위치는 학교 안의 테니스장이었다는 증언을 받았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