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별 · 작전별 사적지 현황
김창숙 생가
기본정보
| 사적지 분류 | 국내항일운동사적지 |
|---|---|
| 운동계열분류 | 민족주의 독립운동 |
| 종류 | 가옥 |
| 상태 | 건물 구조는 그대로이나 몇 차례 수리하였다. |
| 정의 | 1919년 유림단독립청원운동(일명 파리장서운동)을 주도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활동했던 김창숙의 집 |
관련정보
| 관련 사건 | 국채보상운동, 파리장서운동, 나석주의거 |
|---|---|
| 관련 조직 | 대한민국 임시정부(大韓民國 臨時政府) |
| 관련 인물 | 김창숙(金昌淑), 곽종석(郭鍾錫), 이승희(李承熙) |
| 관련 내용 |
김창숙(金昌淑, 1879~1962)의 본관은 의성, 호는 심산(心山)·벽옹(躄翁)이다. 곽종석(郭鍾錫)과 이승희(李承熙)의 문인이다. 김창숙은 1905년 을사5적을 처형하라는 상소를 올렸다가 8개월의 옥고를 치렀다. 1907년부터 성주지역 국채보상운동을 이끌었으며, 1908년 11월에는 대한협회 성주지회에 참여하였다. 1910년에는 사립 성명학교를 설립하여 신교육을 통한 국권수호의 길을 모색하였다. 1919년 3.1만세운동이 일어나자 파리강화회의에 독립청원서를 보내는 제1차 유림단 의거를 주도하였다. 그 뒤 상해로 망명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기여하였으며, 1923년 국민대표회의에 참여하였다. 그런데 임시정부의 독립운동이 침체에 빠지자 새로운 돌파구를 찾던 김창숙은 만주와 몽고의 접경지대에 황무지를 개간하여 새로운 독립운동기지를 건설하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이를 위해 1924년 국내로 들어와 경상도 일원에서 유림을 대상으로 모금활동을 펼쳤으나 목표로 삼은 금액을 모으지 못했다. 이것이 그가 주도한 2차 유림단의거이다. 그는 이때 모금한 돈으로 1926년 12월 나석주 의거를 일으켰다. 1925년에는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부의장으로 활약하였다. 1927년 일본총영사관 경찰에게 붙잡혀 14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그의 묘소는 서울특별시 강북구 수유동 산 127-4번지에 있다. |
| 참고 문헌 |
○ 경상북도경찰부, 『고등경찰요사』, 1934, 243·248쪽. ○ 송상도, 『기려수필』, 국사편찬위원회, 1955, 256-264쪽. ○ 김기승, 『심산 김창숙』(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 인물총서 14), 지식산업사, 2011. ○ 박흥식, 「심산 김창숙의 유교정신과 구국운동」, 『한국학논집』 26, 계명대학교 한국학연구원, 1999, 69쪽. ○ 『동아일보』, 1928년 8월 9일, 5면 1단, 「김창숙사건예심결정서1」. ○ 「곽종석 등 16인의 판결문」, 대구지방법원, 1919년 5월 20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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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정보
| 당시 주소 | 경상북도 성주군 대가면 칠봉동 |
|---|---|
| 주소 | 경북 성주군 대가면 칠봉2길 50-4 (칠봉리 504) |
| 도로명 주소 | |
| 위치 고증 | 『고등경찰요사』와 『기려수필』, 그리고 『동아일보』 1928년 8월 9일자 기사에 관련 내용이 있다. 김창숙 생가는 일부 변형되었으나 건물이 남아있어 위치를 확인하였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