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별 · 작전별 사적지 현황
신명여학교 3·1운동 만세모의지
기본정보
| 사적지 분류 | 국내항일운동사적지 |
|---|---|
| 운동계열분류 | 3·1운동 |
| 종류 | 건물 |
| 상태 | 예전의 모습은 없고 학교가 새롭게 지어졌다. 현재 역사관이 운영되고 있다. |
| 정의 | 1919년 3월 8일 대구 서문시장(시장정) 만세시위를 주도했던 대구 신명여학교 |
관련정보
| 관련 사건 | 3.1운동 |
|---|---|
| 관련 조직 | 신정교회, 계성학교, 신명여학교 |
| 관련 인물 | 이만집(李萬集), 이용상(李容祥), 권의윤(權義允), 김무생(金武生), 김태련(金兌鍊), 백남채(白南採), 이선애(李善愛), 이재인(李在寅), 임봉선(林鳳善), 정광순(鄭光淳), 정재순(鄭在淳), 최경학(崔敬學), 최상원(崔相元), 김무생(金武生) |
| 관련 내용 |
대구의 3.1운동은 3월 8일 대구 서문시장(시장정) 만세시위로 1,000명이 모였고, 3월 10일 남문 밖에서 열린 시위(덕산정)는 수십 명이 참여를 하였다. 3월 30일에 열린 세 번째 시위가 가장 컸는데 남문 밖 시장(덕산정)에서 열린 이날 시위에 약 2,000명이 운집했다. 이 가운데 첫 번째 시위를 주도한 것이 신명여학교 등의 학생이다. 3월 2일 이용상(李容祥)은 200매의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대구의 이만집(李萬集)의 집으로 와서 독립만세 시위의거 준비를 하였다. 3월 8일 오후 3시 서문 밖 시장 즉 서문시장에서 독립운동을 펼치기로 합의하고 동지 규합에 나섰다. 신정교회 목사 정재순(鄭在淳), 장로 정광순(鄭光淳), 계성학교 교사 백남채(白南採), 최상원(崔相元), 최경학(崔敬學), 권의윤(權義允)을 동참시켜 거사 준비를 하였다. 남산교회 조사 김태련(金兌鍊)은 독립선언문을 남산동 자기 집에서 200매를 더 인쇄하고 3월 7일 밤을 새워 태극기 40매를 준비하였다. 이만집은 인원 동원, 계성학교 교감 김영서와 교사 백남채, 최상원, 최경학, 권의윤 등 계성학교 학생들을 포섭 했다. 신명여학교와 당시 대구에 개설돼 운영 중이던 성경학교도 가세를 했다. 신명여학교 학생들의 참여는 김무생(金武生)과 신명여학교 교사인 이재인(李在寅), 졸업생이자 직원인 임봉선(林鳳善), 졸업생 이선애(李善愛)가 맡아 학생 참여의 폭이 더욱 넓어졌다. |
| 참고 문헌 |
○ 광복회 대구광역시지부, 『대구독립운동사』, 매일피앤아이, 2018, 208-223쪽. ○ 경상북도경찰부, 『고등경찰요사』, 1934, 24쪽.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 3-3·1운동사(하), 1983, 355쪽. ○ 안동대학교 안동문화연구소 편, 『경북독립운동사』 Ⅲ-3·1운동, 경상북도, 2013, 66-72쪽. ○ 김의환, 「大邱 三一獨立運動의 考察」, 『대구사학』 7·8, 대구사학회, 1973, 13-14쪽. 권영배, 「대구지역 3·1운동의 전개와 주도층」, 『조선사연구』 6, 조선사연구회, 1997, 129-131쪽. ○ 본관건물(1913년), 『신명백년사』 67쪽. 신명여자중학교 제6회 졸업생(1918년), 『신명백년사』 133쪽. 신명여학교, 『지오 이경희와 대구의 독립운동』 50쪽. ○ 「김태련 판결문」, 고등법원형사부, 1919년 7월 21일. 「김태련 판결문」, 대구복심법원, 1919년 5월 31일. 「김태련 판결문」, 대구지방법원, 1919년 4월 18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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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정보
| 당시 주소 | 경상북도 대구부 남산정(南山町) 동산(銅山) |
|---|---|
| 주소 | 대구 중구 국채보상로102길 48 성명여자중학교 (동산동 206) |
| 도로명 주소 | |
| 위치 고증 | 2018년 10월 본 조사단이 방문하여 현장과 기념탑을 확인하였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