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별 · 작전별 사적지 현황
이상정 집
기본정보
| 사적지 분류 | 국내항일운동사적지 |
|---|---|
| 운동계열분류 | 해외 독립운동가 |
| 종류 | 가옥 |
| 상태 | 1920년대에 지어졌으나, 현재 음식점으로 사용되고 있어 일부 변형되었다. |
| 정의 |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한국광복군에서 활약한 이상정이 살던 곳 |
관련정보
| 관련 사건 | 중일전쟁 |
|---|---|
| 관련 조직 | 대한민국 임시정부(大韓民國 臨時政府), 한국광복군(韓國光復軍) |
| 관련 인물 | 이상정(李相定) |
| 관련 내용 |
이상정(李相定, 1896~1947, 이명 李然浩)은 1896년 6월 10일 대구에서 태어났다. 1919년 일본국학원대학(日本國學院大學)을 졸업하고 대구 계성학교(啓聖學校)와 신명여학교(信明女學校), 1921년부터 1923년까지 경신학교(儆新學校)와 오산학교(五山學校) 교사로 근무하면서 지하조직을 결성하여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또 1923년 만주로 가서 민족교육에 힘썼다. 1926~1927년에는 풍옥상(馮玉詳)의 서북국민부대에서 준장급참모로 활약하고, 장개석의 부대와 통합됨에 따라 국민정부 정규군 소장으로 항일전서에서 활동하였다. 또 김구(金九)·김규식(金奎植) 등의 독립지사들과도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윤봉길(尹奉吉)에게 폭약을 구해주는 등 독립운동에 기여하였다. 1937년 그는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국민정부의 초청으로 중경육군참모학교의 교관을 지내고, 1938년 김구·김규식 등과 더불어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의원 및 외교위원으로도 활동하였다. 또 1940년 9월에는 광복군(光復軍) 창설을 적극 지원하였다. 1942년 8월 임시정부에서는 외무부 내에 외교연구위원회를 설치하자, 그는 신익희(申翼熙)·장건상(張建相)·이현수(李顯洙) 등과 함께 연구위원으로 선임되었다. 1944년에는 홍진(洪震)·강창제(姜昌濟) 등과 함께 신한민주당(新韓民主黨)을 창당하였으며, 1945년 2월에는 동당(同黨) 중앙집행위원에 선임되어 활동하였다. 그는 또한 광복을 맞이할 때까지 중경에서 중국 육군 유격대훈련학교 교관에 취임하여 후진 양성에 노력하였으며 중국군 중장으로 진급하여 광복 후에는 북지방면(北支方面) 일본군의 무장해제를 도왔다. 이상정은 1947년 9월 환국하였으나 40여 일만인 10월 27일 뇌일혈로 운명하였다.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
| 참고 문헌 |
○ 유고출판위원회, 『강남장군 유고 중국유기(李相定將軍 遺稿 中國遊記)』, 청구출판사, 1950, 1·162-163쪽. ○ 최기영, 「李相定(1897~1947)의 在中獨立運動」, 『歷史學報』 200, 역사학회, 2008, 3쪽. ○ 사)거리문화시민연대, 『대구新택리지』, 북랜드, 2007, 262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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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정보
| 당시 주소 | 경상북도 대구부 명치정 2정목 |
|---|---|
| 주소 | 대구 중구 약령길 25-1 (계산동2가 90) |
| 도로명 주소 | |
| 위치 고증 | 「강남(1897~1947) 재중독립운동」에 관련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강남장군 유고 중국유기』에 국내외에서의 활동 사실이 간략히 기재되어 있다. 10년 전 향토역사관 이호 학예사의 증언을 통해 위치를 확인하였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