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별 · 작전별 사적지 현황
이남규부자 순국지 - 외암리
기본정보
사적지 분류 | 국내항일운동사적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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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계열분류 | 의병전쟁 |
종류 | 산야 |
상태 | 변형 / 1986년에 건립한‘수당이남규선생순절의 땅’이라는 기념비가 있다. |
정의 | 1907년 9월 26일 이남규·이충구 부자가 일본군 기마대에 의해 순국한 곳 |
관련정보
관련 사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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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조직 | |
관련 인물 | 이충구(李忠求) |
관련 내용 |
이남규(李南珪, 1855~1907)는 1855년에 태어나 1875년 문과에 급제한 후 홍문관 교리·동학 교수·사헌부 지평·공조참의·안동부관찰사 등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다. 그는 1900년에 관직을 사직하고 고향인 예산의 사저로 낙향하였으며, 이후 일체의 관직에 나가지 않았다. 1906년 홍주의병이 결성되자, 그는 여기에 선봉장으로 참여하였으며, 홍주성전투에서 패한 후에는 의병장 민종식(閔宗植)을 자신의 집에 은신시키면서 홍주의병의 재기를 도왔다. 그러나 그는 이 일로 체포되어 곽한일·박윤식 등과 함께 공주감옥에서 고문을 받았다. 일제는 이남규를 일단 풀어주었으나 1907년 9월 26일 다시 기마대를 파견하여 서울로 압송하였다. 일본군 기마대는 압송 도중 온양(현 아산)의 외암동에서 그를 살해하였고, 이를 막던 아들인 이충구(李忠求)와 하인마저도 함께 살해하였다. 그가 순국한 사실은 민족지인『대한매일신보』(1907년 10월 2일자)에 기사화되면서 알려지게 되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1986년에 이남규부자 순국 당시 생존자였던 가수복(賈壽福)의 증언으로 위치를 확인하여 현장에‘수당이남규선생순절의 땅’이라는 기념비을 건립하였다. |
참고 문헌 |
『대한매일신보』, 1907년 10월 2일, 2면 5단,「何故被禍」. 김상기,「수당 이남규의 학문과 홍주의병투쟁」,『조선시대의 사회와 사상』, 조선사회연구회, 1998, 664-665쪽. 충청남도·충청남도역사문화연구원,『충남의 독립운동가2』, 2011, 101-104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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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정보
당시 주소 | 충청남도 온양군 외암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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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 충남 아산시 |
도로명 주소 | |
위치 고증 | 『대한매일신보』1907년 10월 2일 기사에 의하면 이남규부자가 온양군 외암동에서 순국하였다고 보도하고 있다. 또 1986년 기념비 건립 당시 생존자였던 가수복의 증언이 남아 있어 위치를 확인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