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별 · 작전별 사적지 현황
김창숙 생가
기본정보
| 사적지 분류 | 국내항일운동사적지 |
|---|---|
| 운동계열분류 | 국내독립운동 |
| 종류 | 가옥 |
| 상태 | 변형 / 건물 구조는 그대로이나 몇 차례 수리하였다. |
| 정의 | 1919년 3월 유림단 독립청원운동(일명 파리장서운동)을 주도하고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활동했던 김창숙이 태어난 곳 |
관련정보
| 관련 사건 | 1919.3 제1차 유림단사건(파리장서운동사건)/1925 제2차 유림단사건/1926.12 동양척식주식회사 폭탄투척사건(나석주의거) |
|---|---|
| 관련 조직 | 대한협회 성주지회/대한민국임시정부/대한민국 임시의정원 |
| 관련 인물 | 나석주(羅錫疇) |
| 관련 내용 |
김창숙(金昌淑, 1879~1962)의 본관은 의성, 호는 심산(心山)·벽옹(躄翁)이다. 곽종석(郭鍾錫)과 이승희(李承熙)의 문인이다. 김창숙은 1905년 을사5적을 처형하라는 상소를 올렸다가 8개월의 옥고를 치렀다. 1907년부터 성주지역 국채보상운동을 이끌었으며, 1908년 11월에는 대한협회 성주지회에 참여하였다. 1910년에는 사립 성명학교(星明學校)를 설립하여 신교육을 통한 국권수호의 길을 모색하였다. 1919년 3·1만세운동이 일어나자 파리강화회의에 독립청원서를 보내는 제1차 유림단의거를 주도하였다. 그 뒤 상하이[上海]로 망명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에 기여하였으며, 1923년 국민대표회의에 참여하였다. 이후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독립운동이 침체에 빠지자 새로운 돌파구를 찾던 김창숙은 만주와 몽고의 접경지대에 황무지를 개간하여 새로운 독립운동기지를 건설하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이를 위해 1925년 8월 국내로 들어와 경상도 일원에서 유림을 대상으로 모금활동을 펼쳤으나 목표로 삼은 금액을 모으지 못했다. 이것이 그가 주도한 2차 유림단의거이다. 그는 이때 모금한 돈으로 1926년 12월 동양척식주식회사에 폭탄을 투척한 나석주(羅錫疇) 의거를 일으켰다. 1925년에는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부의장으로 활약하였다. 1927년 5월 일본총영사관 경찰에게 체포되어 1928년 11월 28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14년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이때 일제의 혹독한 고문으로 앉은뱅이가 되어 '벽옹'이라는 별호가 붙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
| 참고 문헌 |
「곽종석 등 16인 판결문」, 1919년 5월 20일, 국가보훈처 공훈전자사료관. 「김창숙 등 3인 판결문」, 1928년 11월 28일, 국가보훈처 공훈전자사료관. 『동아일보』, 1927년 2월 11일~14일, 「유림단사건진상(1~4)」. 『동아일보』, 1928년 8월 9일~15일, 「김창숙사건예심결정서(1~5)」. 경상북도경찰부, 『고등경찰요사』, 1934, 243·248쪽. 심산기념사업준비위원회, 『벽옹(躄翁) 일대기』, 태을출판사, 1964. 송상도, 『기려수필』, 국사편찬위원회, 1971, 256~264쪽. 박흥식, 「심산 김창숙의 유교정신과 구국운동」, 『한국학논집』 26, 계명대학교 한국학연구원, 1999, 69쪽. |
*좌표를 클릭하시면 '길찾기'로 연결됩니다.
지역정보
| 당시 주소 | 경상북도 성주군 대가면 칠봉동 |
|---|---|
| 주소 | 경북 성주군 대가면 칠봉리 504 |
| 도로명 주소 | 경상북도 성주군 대가면 칠봉2길 50-4 |
| 위치 고증 | 「곽종석 등 16인 판결문」·「김창숙 등 3인 판결문」 및 『동아일보』 1927년 2월 11일~14일자, 1928년 8월 9일~15일자 등에 관련 사실과 당시 주소지 등이 기록되어 있다. 김창숙 생가는 일부 변형되었으나 건물이 남아있어 위치를 확인하였다. |














김창숙 공판 관련기사(『동아일보』, 1928년 4월 8일)
김창숙
김창숙 생가 우측
김창숙 생가 좌측
김창숙 생가 전경
김창숙 생가 후면
김창숙 생가 전면
김창숙사건 예심결정서 보도기사(『동아일보』, 1928년 8월 9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