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별 · 작전별 사적지 현황
안희제 생가
기본정보
| 사적지 분류 | 국내항일운동사적지 |
|---|---|
| 운동계열분류 | 국내독립운동 |
| 종류 | 가옥 |
| 상태 | 복원 / 생가지에 생가가 새롭게 복원되어 있다. |
| 정의 | 일제시대 구국교육운동과 독립운동자금 지원 활동 등을 전개한 백산 안희제가 출생한 곳 |
관련정보
| 관련 사건 | |
|---|---|
| 관련 조직 | 대동청년당/백산상회/백산무역주식회사/대한민국임시정부/기미육영회/발해농장/발해학교 |
| 관련 인물 | 윤세복/서상일/나형우 |
| 관련 내용 |
안희제(安熙濟. 1885~1943)은 경남 의령 출생이다. 어릴때는 한학을 공부했고, 이후 양정의숙을 졸업하고 동래군과 고향 의령에 학교를 설립하여 교육 사업에 몰두하면서 계몽운동을 펼쳤다. 1909년 윤세복·서상일·남형우 등과 함께 대동청년당 조직에 가담하였고, 1910년 경술국치가 되자, 만주로 1차 망명한 뒤 독립 운동에 본격적으로 나서게 되었다. 안희제는 독립운동을 위해서는 자금 모집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1914년 부산에 백산상회(백산무역주식회사의 전신)를 설립한 뒤 실업가로서 독립운동을 재정적으로 지원했다. 1919년 상하이에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설립되자 임시정부에 자금을 조달했다. 같은해 11월 장학회인 기미육영회(己未育英會)를 설립했다. 1929년에는 중외일보를 인수해 운영하기도 했다. 1930년대 들어 가산을 정리해 만주으로 재차 망명하여 발해농장과 발해학교를 설립하였다. 대종교 교인이었던 그는 대동청년당 시절부터의 동지인 윤세복이 교주로 있는 대종교를 중심으로 독립운동을 벌였다. 1942년 11월 임오교변(壬午敎變)으로 체포되었다가, 고문 끝에 병보석으로 풀려났다가 출감 다음날인 1943년 9월 2일에 사망했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고향인 의령에 생가가 복원되어 있으며, 부산에는 백산기념관이 세워져 있다. |
| 참고 문헌 |
「토지대장」. 「의령군 부림면 입산리 지적원도」, 조선총독부 임시토지조사국, 1914. 「기미육영회에 관한 건」, 1920년 9월 4일, 『조선소요사건관계서류(6)』; 국가보훈처 공훈전자사료관. 『 朝鮮總督府官報』, 1917년 11월 17일,「휘보 : 상사 - 회사설립허가」. 『신한민보』, 1929년 11월 28일,「 사회 각계 유지를 망라, 조선국어사전편찬회 조직」. 『시대일보』, 1926년 7월 7일,「부산부민대회, 장학회 악분자 성토」. 李東彦,「白山安熙濟硏究」,『 한국독립운동연구』8, 1994. 강대민,「白山安熙濟의 大東靑年團運動」,『慶星大學校論文集』18-2, 1997. 부경역사연구소 편,『시민을 위한 부산인물사 -근·현대편-』, 선인, 20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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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정보
| 당시 주소 | 경상남도 의령군 부림면 입산리 169 |
|---|---|
| 주소 | 경남 의령군 부림면 입산리 168 |
| 도로명 주소 | 경상남도 의령군 부림면 입산로2길 37 |
| 위치 고증 | 「토지대장」·「의령군 부림면 입산리 지적원도」등을 통해 안희제 생가임을 확인하였다. |














만주 발해농장 수문 개통기념
모친상을 치룬 후 생가에 모인 안희제 가족들
안희제
안희제 생가 입구
안희제 생가 정면
안희제 생가 측면
안희제 생가 정문
만주 발해농장 사무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