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별 · 작전별 사적지 현황
유성가도 전투지
기본정보
| 사적지 분류 | 국가수호사적지 |
|---|---|
| 운동계열분류 | 지역작전 |
| 종류 | 기타(하천) |
| 상태 | 변형 / 갑천이 흐르고 있어 주변 지형은 대강 알 수 있다. 주변 시가지와 갑천변 정비, 만년교 개축으로 당시 모습은 남아있지 않다. |
| 정의 | 북한군의 남침 직후 1950년 7월 20일 미 제 24사단 34연대가 대전 방어를 위해 1번 국도를 타고 내려오는 북한군의 진출을 저지하기 위해 방어전을 수행한 곳 |
관련정보
| 관련 사건 | 공주 전투, 영동 전투 |
|---|---|
| 관련 조직 | 미 제24사단, 제19연대, 제21연대, 제34연대 |
| 관련 인물 | 딘 장군 |
| 관련 내용 |
1950년 7월 18일 미 제24사단 사단장 딘 소장은 금강방어선이 무너지자 34연대를 대전 갑천변을 중심으로, 21연대를 마달령, 19연대를 영동에 배치하여 지연전을 실시하기로 하였다. 원래 딘 소장은 7월 19일 야간에 제34연대를 철수하기로 결정하였으나 미 제8군 사령관 워커 장군이 향후 미군 작전을 위해 지연작전을 지시하였던 것이다. 금강방어선을 돌파한 북한군은 제3사단이 유성 방면에서, 제4사단이 논산 방면에서 대전을 포위하기 시작하였다. 제4사단 제18연대는 7월 18일부터 논산에서 대전 남쪽으로 우회하여 미군 철수로를 차단하려 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7월 19일 아침 북한군 야크기가 미 34연대 1대대가 방어하고 있던 유성 주변의 진지와 대전비행장에 설치된 연대지휘소 등에 폭격을 가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34연대는 지휘소를 대전시청으로 옮기고, 유성에 있던 병력을 갑천 건너로 철수시켰다. 20일 새벽 3시 북한군은 유성가도를 통해 대전시내로 진출을 시작하였다. 북한군 병력은 어두운 새벽을 틈타 갑천을 건너 도로의 남북쪽으로 진출하고, 전차는 대전 시내로 통하는 유성가도를 따라 깊이 들어와 후방을 교란하였다. 북한군 병력과 전차가 갑천을 건너 미군 진지를 지나 대전비행장을 향하자 미 제34연대 1대대는 통신까지 두절된 상태에서 남쪽의 논산가도로 우회 철수를 시도하였다. 그러나 논산가도에도 북한군이 들어오면서 결국 분산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한편, 제34연대장은 1대대의 상황을 모르는 상태에서 북한군 전차를 확인하면서 후방으로 철수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
| 참고 문헌 |
육군본부,『 한국전쟁사』2, 1979, 497-532쪽.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6·25전쟁사』4, 2008, 126-171쪽. 국방군사연구소,『한국전쟁』(상), 1995, 249-253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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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정보
| 당시 주소 | 충청남도 대덕구 유성면 봉명리 |
|---|---|
| 주소 | 대전 유성구 봉명동 만년교 일대 |
| 도로명 주소 | |
| 위치 고증 | 『6·25전쟁사』4권에 관련 사실이 명기되어 있다. 전투도를 살펴보면 유성-대전가도상에서 전투가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는데, 갑천변에서 대치한 형세를 가지고 있어 당시 유성-대전가도가 지나가던 만년교 주변을 특정하였다. |














갑천을 내려다 보는 미군 기관총진지
만년교(유성 방향)
만년교(상류 방향)
만년교(월평동 방향)
만년교(하류 방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