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별 · 작전별 사적지 현황
동두천장터 3·1운동 만세시위지
기본정보
| 사적지 분류 | 국내항일운동사적지 |
|---|---|
| 운동계열분류 | 3·1운동 |
| 종류 | |
| 상태 | 변형 / 장이 서던 동두천역 앞쪽 일대가 크게 변화하였고, 시장 터의 일부에는 미군부대가 주둔해 있다. 큰 도로가 있어 옛 모습을 찾아보기 어렵다. |
| 정의 | 1919년 3월 26일 양주군 이담면 동두천 일대 주민들이 만세시위를 벌인 곳 |
관련정보
| 관련 사건 | 1919.3.26 동두천장터 독립만세시위 |
|---|---|
| 관련 조직 | |
| 관련 인물 | 홍덕문/정원이/고복돌/박창배/박경필/한원택 |
| 관련 내용 |
1919년 3월 중순경 정원이(鄭元伊)가 서울과 연락을 맡고, 청년지도자인 한원택(韓元澤)과 박창배(朴彰培)를 중심으로 독립선언서·태극기 등을 준비하였으며, 거사일을 동두천장날인 3월 26일로 잡았다. 1919년 3월 26일 송내·지행·좌기골·기촌·빈양말·하봉암·상봉암·창말·싸리말·안흥리 등 10여 마을 주민 1,300여 명이 일시에 시장으로 집결하였다. 이때 일찍이 만세시위에 참가한 적이 있고 만세대장으로 불리던 홍덕문(洪德文,洪秉俊)이 선두에 서서 ‘대한독립만세’를 선창하자 군중들도 만세를 복창하면서 시장을 행진하였다. 이들은 이담면사무소로 몰려가 면장 신공우(申公雨)에게 함께 만세를 부를 것을 요구하였고, 동두천역으로 진출하여 정차된 기차를 향해 만세를 불렀다. 그러자 주내면에서 급파된 일본 헌병들이 칼을 빼들고 시위대를 공격하였다. 이에 박경필(朴慶弼)·고복돌(高福乭)이 헌병이 타고 있던 말의 다리를 몽둥이로 쳐 쓰러뜨리자, 헌병들은 총개머리를 휘둘러 선두에 섰던 홍덕문 등에게 부상을 입혔다. 이렇듯 일본 헌병의 탄압으로 시위 주동자 7명이 체포되면서 시위대는 해산하였다. |
| 참고 문헌 |
高 第8946號, 「獨立運動에 관한 건(제28보)」, 1919.03.27. 密 第102號/其131 第94號 [電報: 京畿道 黃海道의 시위운동 상황], 1919.03.27. 秘受 03612號, [電報譯: 二十五日京畿高陽郡松浦面ニテ…], 1919.03.28. 密 第102號/陸密其 第98號,「朝鮮에 있어서 獨立運動에 關한 件(次官으로부터 侍從武官長」에 통첩」, 1919.04.02. 朝特報 第9號, 「騷擾事件에 관한 狀況(1919.3.26.~1919.4.5.)」, 1919.04.07. 騷擾事件報告臨時報 第12號, 「騷擾事件 經過 槪覽表(1919.3·1.~1919.4.30.)」, 1919.05.10. 朝憲警 第107號, 「朝鮮騷擾事件一覽表에 關한 件」, 1919.10.02. 이병헌, 『삼일운동비사』, 시사시보사 출판국, 1959, 874쪽. 「독립운동에 관한 건(제28보)」, 1919년 3월 27일; 국회도서관, 『한국민족운동사료』 3·1운동편 3, 1979, 129~130쪽. 동두천향토지 편찬위원회, 『동두천시 향토지』, 1988, 56·77~78·80~81쪽. 동두천시사편찬위원회, 『동두천시사』 상, 동두천시, 1998, 250~252쪽. 동두천시, 『동두천시의 역사와 문화유적』, 1999, 26쪽. 동두천시사편찬위원회, 『동두천시 30년사』 2, 동두천시, 2012, 308~312쪽. 동두천시사편찬위원회, 『동두천시 30년사』 7, 동두천시, 2012, 97·221·223·224·228·231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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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정보
| 당시 주소 | 경기도 양주군 이담면 동두천리 |
|---|---|
| 주소 | 경기도 동두천시 동두천동 245 |
| 도로명 주소 | |
| 위치 고증 | 『삼일운동비사』 및 「독립운동에 관한 건(제28보)」(1919.3.27) 등에 관련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1918년 조선총독부에서 발행한 1:50,000 「포천지도」에 동두천역 앞쪽으로 동두천시장이 표시되어 있다. 동두천시 창말에 거주하는 유영상 씨(남, 70세) 등에 따르면 동두천시장은 6·25전쟁 때 소실되었고, 당시 장터 중 상당 면적은 미2사단 부지에 편입되었다고 한다. 김도훈(한국교원대 연구교수) 이 자문하여 내용을 확인하였다. |














『군세일반』(1930) 중「양주군 관내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