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별 · 작전별 사적지 현황
괴산경찰서 터 3·1운동 만세시위지
기본정보
| 사적지 분류 | 국내항일운동사적지 |
|---|---|
| 운동계열분류 | 3·1운동 |
| 종류 | 건물 |
| 상태 | 멸실 / 당시의 건물은 남아 있지 않고, 현재 건물은 1988년에 건립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
| 정의 | 1919년 3월 19일 괴산장터에서 만세시위를 주도하던 인물들이 체포되자 군중들이 몰려가 석방을 요구하며 투석전을 벌인 괴산경찰서가 있던 곳 |
관련정보
| 관련 사건 | 1919 3·1운동 |
|---|---|
| 관련 조직 | |
| 관련 인물 | 홍명희(洪命熹), 이재성(李載誠), 홍용식(洪用植) |
| 관련 내용 |
1919년 3월 19일 홍명희 등이 주도한 괴산장터 만세시위에 수많은 군중이 모이자 일제 경찰은 긴급 출동하여 홍명희·이재성·홍용식 등 18명을 체포하고 태극기와 독립선언서 등을 압수하였다. 그러자 군중 약 700여 명이 경찰서·우편국·군청 등으로 진출하여 투석전을 전개하였다. 이에 일제는 충주에서 현병경찰관 10명과 보병 장교 이하 12명을 파견하여 탄압에 착수했다. 오후 10시경, 시위대는 경찰서에서 일제의 탄압을 받아 해산되었으나 이튿날 오후 2시경까지 읍내 곳곳에서 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이 과정에서 일제에 체포된 홍명희는 징역 2년 6개월, 이재성은 징역 2년, 홍용식은 징역 1년 6개월 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1990년 홍용식, 1995년 이재성에게 각각 애족장을 수여하였다. |
| 참고 문헌 |
「홍명희 등 3인 판결문」, 1919년 4월 17일 국가보훈처 공훈전자사료관. 「朝鮮總督府 內秘補 294; 忠北機第233號: 地方騷擾報告」, 1919년 3월 25일, 『大正八年 騷擾事件ニ關スル道長官報告綴』 2. 「密 第102號 其152/朝特報 第8號: 騷擾事件에 關한 狀況(3月16日~3月25日)」, 1919년 3월 31일, 『朝鮮騷擾事件關係書類』 4. 「騷擾事件의 後報, 충청북도 槐山, 다수의 군중이」, 『매일신보』, 1919년 3월 22일. 「騷擾事件의 後報, 충청북도 槐山, 주모자 체포됨」, 『매일신보』, 1919년 3월 25일. 「學生은 放還, 주모자는 오인」, 『매일신보』, 1919년 3월 26일.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자료집』 5, 1972, 1079~1080쪽. 조선총독부, 「괴산」, 『근세한국오만분지일지형도』, 1918. 김정명, 『조선독립운동』 Ⅰ, 原書房, 1967, 403·406·436쪽.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 3, 1971, 55~56쪽. 박걸순, 『괴산지방 항일독립운동사』, 괴산문화원, 1996, 109~111쪽. 오대록, 「괴산지역 3·1운동의 전개와 의의」, 『충북의 3·1운동, 그 기억과 기념』, 충북연구원, 2019, 69~70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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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정보
| 당시 주소 | 충청북도 괴산군 괴산면 서부리 |
|---|---|
| 주소 | 충북 괴산군 괴산읍 읍내로11길 26(서부리 266) |
| 도로명 주소 | |
| 위치 고증 | 「홍명희 등 3인 판결문」과 『조선독립운동』 Ⅰ 등에 관련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2008년 조사 당시 지역주민인 향토사학자 김근수·이춘택씨의 증언을 통해 당시 경찰서의 정문 위치를 확인할 수 있었다. |














괴산 3·1운동 만세시위 참여자 공판 관련기사(『매일신보』, 1919년 5월 28일)
괴산 3·1운동 주동자 체포 기사(『매일신보』, 1919년 3월 2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