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별 · 작전별 사적지 현황
옛 영명학교 3·1운동 발원지
기본정보
사적지 분류 | 국내항일운동사적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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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계열분류 | 3·1운동 |
종류 | 건물 |
상태 | 멸실 / 과거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으며 세풍아파트와 거리로 변모하였다. |
정의 | 1919년 3월 5일 일어난 옥구군 구암리의 독립만세시위운동을 계획하고 주도한 곳 |
관련정보
관련 사건 | 1919.3.5 옥구군 구암리 독립만세시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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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조직 | 영명학교 |
관련 인물 | 김병수(金炳洙)/이두열(李斗悅)/박연세(朴淵世)/송정헌(宋正憲)/고석주(高錫柱)/김수영(金洙榮)/이준명(李俊明)/김성은(金聖恩)/김영후(金永厚)/송기옥(宋基玉)/김윤실(金潤實)/양기준(梁基俊)/유한종(劉漢鍾)/임종우(林鍾祐)/김영상(金永祥)/문재봉(文在鳳)/유복섭(劉複燮)/고준상(高俊相)/홍천경(洪天敬) |
관련 내용 |
옥구군 구암리에서의 독립만세시위는 1919년 3월 5일에 기독교계의 사립학교인 영명학교(永明學校) 교사와 학생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영명학교 졸업생이자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학생인 김병수(金炳洙)가 2월 28일 독립선언서 200장을 가지고 와 영명학교 교사 이두열(李斗悅)·박연세(朴淵世)·송정헌(宋正憲)·고석주(高錫柱)·김수영(金洙榮) 등에게 전하였고, 이들은 학교 기숙사에서 선언서 3천 5백장을 더 인쇄하여 기독교 신자들에게 돌리고 널리 인근 지방까지 나누어 주었다. 이어 이두열·이준명(李俊明)·김성은(金聖恩) 등은 영명학교 학생 김영후(金永厚)·송기옥(宋基玉) 등에게 지시하여 기숙사 2층에서 독립선언서를 등사하고 태극기를 준비하도록 했다. 그런데 3월 5일 거사계획이 사전에 발각되어 새벽 군산경찰서의 무장 경찰 수십 명이 주모자인 박연세·이두열을 체포하였다. 이에 교사 김윤실(金潤實)과 학생들은 석방시위를 벌이기로 하기로 결의, 군산경찰서 앞으로 가서 태극기를 흔들며 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이 시위로 인하여 영명학교 교사 이두열은 징역 3년형을, 김수영·박연세는 징역 2년 6월형을, 고석주·김성은·양기준(梁基俊)·유한종(劉漢鍾)·임종우(林鍾祐)·김영상(金永祥)·문재봉(文在鳳) 및 학생 유복섭(劉複燮)·고준상(高俊相)·홍천경(洪天敬) 등 30여 명은 징역 1년 6월형 내지 징역 6월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렸다. 영명학교는 1903년 2월 미국 남장로선교사 젠킨에 의해 설립되었다. 1952년 군산영명학교로, 1975년 군산제일고등학교와 군산제일중학교로 분리되었으며, 1977년 군산시 조촌동으로 이전하였다. |
참고 문헌 |
「이두열 등 37인 판결문」, 1919년 4월 30일, 국가보훈처 공훈전자사료관. 『신한민보』, 1919년 7월 12일, 「군산영명학교 전체가 활동」. 『동아일보』, 1920년 9월 23일, 「박·김 양씨 출감」. 이병헌, 『삼일운동비사』, 시사시보사 출판국, 1959, 902~903쪽.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 3, 1971, 523~525쪽. 전북지역독립운동추념탑추진위원회, 『전북지역독립운동사』, 신아출판사, 1994, 447~450쪽. 군산시사편찬위원회, 『군산시사』 하, 군산시, 2000, 118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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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정보
당시 주소 | 전라북도 옥구군 개정면 구암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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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 전북 군산시 구암동 333-1 |
도로명 주소 | |
위치 고증 | 『신한민보』 1919년 7월 12일자, 『동아일보』1920년 9월 23일자 및 「이두열 등 37인 판결문」 등에 관련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구암동 자치센터 관계자 및 구암교회 원로들의 증언을 토대로 위치를 확인하였다. 세풍아파트 105동·107동 일대가 영명학교가 있던 자리이며, 세풍아파트 앞 진입로는 영명학교 이름을 따 영명로라고 이름지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