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별 · 작전별 사적지 현황
세교장터
기본정보
| 사적지 분류 | 국내항일운동사적지 |
|---|---|
| 운동계열분류 | 의병전쟁, 3·1운동 |
| 종류 | 건물 |
| 상태 | 변형 / 현재 의병활동을 벌인 세교장터는 없어졌으며, 그곳에 주택이 들어서 있고, 밭으로도 사용되고 있다. 세교1리 마을회관 입구에는 가는다리 유래비가 설치되어 있는데 내용에 따르면 1910년 대홍수로 서당리에 있던 장터가 유실되어 세교리로 옮겨 왔고, 1923년 5월 내수역이 완공되자 장터는 내수 삼봉장터로 옮겨 갔다고 적혀 있다. |
| 정의 | 1907년부터 1910년까지 한봉수 의병부대가 의병활동을 하고 1919년 3월 25일과 4월 1~2일 세차례에 걸쳐 한봉수의 주도하에 청주군 북일면 세교리 주민들이 독립만세시위를 벌인 곳 |
관련정보
| 관련 사건 | 1919.3.25 청주군 세교장터 독립만세시위/1919.4.1~2 청주군 세교장터 독립만세시위 |
|---|---|
| 관련 조직 | |
| 관련 인물 | 한봉수(韓鳳洙)/이태우(李太雨)/임봉수(林鳳洙)/엄익래(嚴翼來)/이건간(李建簡) |
| 관련 내용 |
한봉수(韓鳳洙, 이명 韓鳳瑞)는 청주군 세교리 출신으로 세교장터를 중심으로 활발한 의병활동을 전개했는데, 1907년 11월 세교장터의 일본인 금광업자를 습격하여 그 집을 불태우고 군자금으로 수취하였다. 1908년 1월에는 세교장터에서 군자금을 모금하고, 일본헌병대에 의병을 밀고하여 큰 해를 입힌 전 일진회원을 추적해 처단하였다. 1908년 2월에는 의병 20~30여 명과 함께 세교에서 충주로 가는 우편행랑을, 4월에도 우편행랑을 습격하여 군자금을 모집하였다. 또한 5월에도 초정에서 우편행랑을 습격하여 호위 기병 1명을 사살하고 군자금을 모집했으며, 12월에는 의병 10명과 함께 청주로 오던 우편행랑을 습격하기도 하였다. 이후 일본 헌병에게 체포되어 1910년 6월 공주지방재판소 청주지부에서 폭동죄로 사형선고를 받고 경성공소원에 공소하여 유형 15년에 처해졌다가 같은 해 8월 대사령으로 사면 석방되었다. 1919년 세교리에서는 3월 25일과 4월 1일 및 2일에 세차례에 걸쳐 만세시위가 전개되었다. 3월 25일에는 정확한 참여 인원이나 인명은 밝혀지지 않았지만 주민들이 등불[提橙]을 들고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또한 4월 1일 밤에는 한봉수·이태우(李太雨)·임봉수(林鳳洙) 등이 세교장터에서 주민 수십명과 함께 '조선독립만세'를 부르면 시위를 일으켰다. 한봉수는 계속하여 다음날인 2일 정오경에 세교장터로 나가 주민들이 모여 있을 때 마침 나무를 심기 위해 그곳을 지나던 내수공립보통학교 교사 엄익래(嚴翼來)·이건간(李建簡) 및 학생 80여 명에게 독립만세시위에 참여할 것을 호소하여 이들과 함께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이때 주모자로 체포된 한봉수는 1919년 5월 6일 공주지방법원 청주지청에서 징역 1년형을, 임봉수·이태우는 태형 90대를 언도받고 복역했다. 한봉수는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받았다. |
| 참고 문헌 |
「한봉수 판결문」(1910년 6월 29일 공주지방재판소 청주지부). 「한봉수 판결문」(1910년 8월 29일 경성공소원). 「朝鮮總督府 內秘補 433; 忠北機第269號: 地方狀況報告」, 1919년 4월 5일,『大正八年 騷擾事件ニ關スル道長官報告綴』4.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자료집』 5, 1971, 1100~1101쪽.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자료집』 3, 1971, 536~537쪽. 박걸순, 「의병장 한봉수의 항일투쟁」,『한국독립운동사연구』10,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1996, 263~290쪽. 청주문화원,『청주의 독립운동과 독립운동가』, 2019, 20~53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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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정보
| 당시 주소 | 충청북도 청주군 북일면 세교리 |
|---|---|
| 주소 | 충청북도 청주시 청원구 내수읍 세교리 208-6 일대 |
| 도로명 주소 | |
| 위치 고증 | 「한봉수 등 3인 판결문」 및 『독립운동사자료집』 3권 등에 관련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














세교장터 원경
한봉수
세교장터 전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