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별 · 작전별 사적지 현황
산청장터 3·1운동 만세시위지
기본정보
| 사적지 분류 | 국내항일운동사적지 |
|---|---|
| 운동계열분류 | 3·1운동 |
| 종류 | 거리 |
| 상태 | 변형 / 군청 앞으로 대로가 생기면서 장터의 전체적 모습과 크기가 변형되었다. |
| 정의 | 1919년 3월 22일 산청군 산청면에서 만세시위가 전개된 곳 |
관련정보
| 관련 사건 | 1919 3·1운동 |
|---|---|
| 관련 조직 | 산청결사대 |
| 관련 인물 | 오명진(吳明鎭)/민영길(閔泳吉)/신영희(申永熙)/오원탁(吳元卓)/최오룡(崔五龍)/신창훈(愼昌勳)/신몽상(申夢相)/민치방(閔致方) |
| 관련 내용 |
경남 산청군 산청면에서의 3·1운동은 옥동에 거주하는 동경 유학생 오명진이 귀국 후 독립선언서를 구하여 구두 밑창에 숨겨 귀향하면서 시작되었다. 1919년 3월 18일 오후 5시 경 오명진은 민영길·신영희·오원탁·최오룡·신창훈·신몽상 등과 산청면 색동 수계정에서 비밀회합을 가졌는데, 이를 후세사람들은 이른 바, ‘산청결사대’라 하였다. 이들은 산청면에서의 의거를 장날인 3월 22일로 정하고, 산청면사무소 등사기를 가져와 선언서·결의서·태극기 등 1,500장을 등사 인쇄하였다. 보다 효과적인 거사를 위하여 이들은 산청군수 홍승균(洪承均)을 포섭하려 독립선언서 1천매를 전달하였으나, 그는 이 사실을 일본군 헌병대에 신고하였다. 이리하여 3월 21일 오전 1시경 신영희·민영길·신몽상 등이 검거되고 그 집이 수색당하는 등의 불상사가 발생하였다. 그러나 의거 소식은 이미 널리 전파되어 예정대로 진행될 수 있었다. 3월 22일 산청장날 누군가의 주도로 만세시위가 시작되었다. 이에 일본군 헌병대는 당황하여 시위대에 총격을 가하여, 민치방 등이 부상을 입었다. 시위군중의 해산 이후 만세운동의 지도자들은 모두 검거되었다. |
| 참고 문헌 |
『산청군 군월면 색동 지적원도』, 조선총독부 임시토지조사부, 1914. 「朝鮮五萬分一地形圖; 山淸」, 조선총독부, 1918. 조선헌병대사령부,『조선소요사건상황』, 1919, 108쪽. 경상남도경찰부,『고등경찰관계적록』, 1936, 21∼22쪽.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3, 1971, 316∼318쪽. 한국문화원연합회 경상남도지회,『경남지역 3·1독립운동사』, 2007, 210∼211쪽. 오주환,『산청향토사』, 신우, 2005, 458∼463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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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정보
| 당시 주소 | 경상남도 산청군 산청면 색동 |
|---|---|
| 주소 | 경남 산청군 |
| 도로명 주소 | 경상남도 산청군 산청읍 중앙로 15 |
| 위치 고증 | 『조선소요사건상황』과 『고등경찰관계적록』 등에 관련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조선오만분일지형도; 산청」에 산청장터가 표기되어 있으며, 「산청군 군월면 색동 지적원도」와 현재의 지적도를 비교하여 그 위치를 비정하였다. 산청문화관의 박은조 등 복수의 증언들과도 대체로 일치하였다. |














산청장터(「朝鮮五萬分一地形圖; 山淸」, 1918)
산청장터(「산청군 군월면 색동 지적원도」, 1914)
산청장터 원경
산청장터 일대
산청장터 전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