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별 · 작전별 사적지 현황
다솔사 - 만당 근거지
기본정보
| 사적지 분류 | 등급분류 제외(항일운동) |
|---|---|
| 운동계열분류 | 국내독립운동 |
| 종류 | 건물 |
| 상태 | 원형보존 / 일부 낡은 건물이 보수되거나 새 건물이 만들어지기도 했으나, 대웅전과 대양루(大陽樓) 등 주요한 건물은 원형 그대로 보존되고 있다. |
| 정의 | 1930년 5월 항일투쟁을 위해 한용운 등이 중심이 되어 결성한 불교계 비밀결사 조직 만당의 근거지가 있던 곳. |
관련정보
| 관련 사건 | |
|---|---|
| 관련 조직 | 만당/불교청년동맹 |
| 관련 인물 | 한용운(韓龍雲)/김법린(金法麟)/허영호(許永鎬)/장도환(張道煥)/최범술(崔凡述)/박근섭(朴根燮)/박영희(朴暎熙)/김범부(金凡夫) |
| 관련 내용 |
만당(卍黨)은 일제시기 불교계의 대표적인 항일 비밀결사 단체이다. 1930년 5월 만해 한용운의 민족의식에 큰 영향을 받은 불교청년들이 식민지 불교의 극복, 불교의 자주화, 불교의 대중화를 기하려는 의식에서 태동되었다. 이러한 성격은 '정교분립, 교정의 확립, 불교 대중화'라는 만당의 강령과 법성을 지키고 민족을 구하겠다는 내용의 선언에서 자세하게 드러난다. 만당은 다솔사(多率寺)를 근거지로 하여 일제 침략 세력과 줄기차게 투쟁하였다. 국내뿐만 아니라 토쿄[東京]에까지 지부를 조직했는데, 토쿄 지부 책임자는 김법린이었고, 허영호·장도환·최범술 등이 지부 당원이었다. 만당은 표면 단체로 불교청년동맹을 조직하고 각지에서 청년운동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1932년 봄에는 당세가 확장되어 80명의 당원을 확보하면서 활발히 운동을 전개하였다. 당시 당원으로서 엄수해야 할 서약으로는 비밀한사엄수(秘密限死嚴守)와 당에 대한 절대 복종 두 가지가 있었으며 모든 것은 기록을 남기지 않도록 규제되어 있었다. 그러나 일제의 삼엄한 사찰로 1938년 말 만당은 진주경찰서에 검거되기 시작하였다. 서울과 사천을 비롯한 진주·합천·해남·양산 등지에서의 6차례에 걸친 경찰의 검거 선풍으로 김법린·장도환·최범술·박근섭·박영희·김범부 등이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다솔사는 511년 연기조사(緣起祖師)가 영악사(靈岳寺)로 개창했다가 636년에 자장(慈藏)이 건물 2동을 지으며 다솔사(陀率寺)로 개명하였고, 676년 의상(義湘)이 영봉사(靈鳳寺)로 바꾼 뒤, 신라 말기에 도선(道詵)이 건물 4동을 증축하면서 다시 다솔사(多率寺)로 고쳤다. 1326년 나옹(懶翁)이 중수한 뒤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었는데, 1704년 숙종 때 원래의 모습을 되찾았다. 현재의 모습은 1915년 1월의 화재로 타버린 것을 이듬해에 다시 세운 것이다. |
| 참고 문헌 |
『해동지도(海東地圖)』.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독립운동사』8, 1976, 880~882쪽. 김광식,「만당과 효당 최범술」,『동국사학』42, 동국사학사, 2006, 197~234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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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정보
| 당시 주소 | 경상남도 사천군 곤명면 용산리 |
|---|---|
| 주소 | 경남 사천시 곤명면 용산리 86 |
| 도로명 주소 | |
| 위치 고증 | 다솔사의 위치는 조선 영조대에 간행된『해동지도』에 곤양읍성 북쪽에 위치한 것으로 확인되는데, 다솔사 사적기를 통해 창건된 원래의 위치에 그대로 자리잡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였다. |














다솔사
다솔사(해동지도)
다솔사 황금편백 - 한용운 환갑 때 심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다솔사 적멸보궁
다솔사 안심료
다솔사 대양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