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별 · 작전별 사적지 현황
오화영 사택 터
기본정보
| 사적지 분류 | 국내항일운동사적지 |
|---|---|
| 운동계열분류 | 3·1운동 |
| 종류 | 가옥 |
| 상태 | 멸실 / 현재 종교교회가 들어서 있다. |
| 정의 |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이었던 오화영이 3·1운동 당시 살던 곳 |
관련정보
| 관련 사건 | 1919 3·1운동 |
|---|---|
| 관련 조직 | 신간회/흥업구락부 |
| 관련 인물 | |
| 관련 내용 |
오화영(吳華英: 吳夏英, 1880∼1960)은 황해도 평산 출생이다. 어릴 때 한학을 공부하다가 동학에 입교한 적이 있으나, 곧바로 기독교로 개종하여 1906년 세례를 받았다. 협성신학교를 졸업하고 1918년 남감리교회의 목사가 되었다. 1919년 3·1운동 때는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참여해 개성과 원산 방면에 독립선언서를 배포하는 임무를 맡았고, 이로 인해 2년 6개월의 옥고를 치렀다. 이후 조선물산장려운동에 적극 관여하는 한편, 신간회에도 참여해 민중대회사건으로 옥고를 치렀으며, 흥업구락부사건에도 연루되어 고초를 겪었다. 해방 후 대한독립촉성국민회 부회장과 남조선과도입법의원 등을 지냈다. 1950년 5월 제2대 민의원에 당선되었으나 다음 달 6·25전쟁이 일어나면서 납북되었다. 1960년 9월 사망했다. 1989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
| 참고 문헌 |
「오화영 신문조서」; 국사편찬위원회, 『한민족독립운동사자료집』12, 1990, 70∼74쪽. 「손병희 등 48인 판결문」, 1920년 8월 9일, 국가보훈처 공훈전자사료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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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정보
| 당시 주소 | 경성부 도렴동 32 |
|---|---|
| 주소 | 서울 종로구 |
| 도로명 주소 | 서울특별시 종로구 사직로8길 48 (도렴동 종교교회) |
| 위치 고증 | 1919년 8월 26 고등법원의 「오화영 신문조서」 및 「손병희 등 48인 판결문」 등에 당시 주소지가 기록되어 있다. 당시 목사 사택으로 사용되었다. |














오화영
오화영 사택 터 - 현 종교교회 주변
옛 종교교회
오화영이 목사로 시무했던 종교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