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별 · 작전별 사적지 현황
박동완 집터
기본정보
| 사적지 분류 | 국내항일운동사적지 |
|---|---|
| 운동계열분류 | 3·1운동 |
| 종류 | 가옥 |
| 상태 | 멸실 / 현재 통인오거리길 도로로 바뀌어 있다.(누하동 210, 213번지 사이 구간 동쪽) |
| 정의 |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이었던 박동완이 3·1운동 당시 살던 곳 |
관련정보
| 관련 사건 | 1919.3.1 3.1독립만세운동 |
|---|---|
| 관련 조직 | 신간회/흥업구락부 |
| 관련 인물 | 박희도 이필주 |
| 관련 내용 | 박동완(朴東完, 1885~1941)은 경기도 양평에서 태어나 1901년 서울로 이주하였다. 한성중학교를 졸업하고 한성외국어학교를 거쳐 배재학당 대학부에 전입하면서 기독교인이 되었다. 이후 기독교신보사 서기로 근무하다가 1919년 2월 중앙YMCA 간사 박희도(朴熙道)의 권유로 자신이 전도사로 시무하던 정동제일교회 목사 이필주(李弼柱)와 함께 민족대표 33인으로 참여했다. 이 일로 2년간 옥고를 치르고 출옥한 후, 『기독신보』주필,『 신생명』주간, 신간회 간사 등을 역임하였다. 그 뒤 하와이로 건너가 목사로 재직하면서 흥업구락부와 비밀 연락을 취하며 국내 민족운동을 후원하였다. 교회 사무와 민족운동으로 바쁜 나날을 보내던 중 불의의 병을 얻어 1941년 2월 사망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
| 참고 문헌 |
「(경성지방법원)손병희 등 48인 예심종결결정」, 1919년 8월 1일, 국가보훈처 공훈전자사료관 「(고등법원 특별형사부)손병희 등 48인 예심종결결정」1920년 3월 22일, 국가보훈처 공훈전자사료관 「(고등법원)박동완 신문조서」「; 국사편찬위원회, 『한민족독립운동사자료집』12, 1990, 74~77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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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정보
| 당시 주소 | 경성부 누하동 214 |
|---|---|
| 주소 | 서울 종로구 누하동 213 |
| 도로명 주소 | 서울특별시 종로구 자하문로9길 36 (누하동 통인오거리길) |
| 위치 고증 | 1919년 8월 26일 고등법원에서 진행된 「박동완 신문조서」및「(고등법원특별형사부)손병희 등 48인 예심종결결정」 등에 당시 주소지가 기록되어 있다. |














배화여대 쪽에서 본 박동완 집터
박동완
통인오거리에서 본 박동완 집터 - 중앙의 과속방지턱 부분이 213번지이였던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