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별 · 작전별 사적지 현황
강화잠두교회 항일운동지
기본정보
| 사적지 분류 | 국내항일운동사적지 |
|---|---|
| 운동계열분류 | 3·1운동 |
| 종류 | 건물 |
| 상태 | 멸실 / 현 교회 건물은 후대에 신축한 것이다. |
| 정의 | 이동휘가 다닌 교회이며, 교인들이 1907년 일본군의 강화기독교인 탄압에 저항하고, 1919년 3월 18일 독립만세유인물을 인쇄, 배포했던 곳 |
관련정보
| 관련 사건 | 한국군해산, 강화 3·1 운동 |
|---|---|
| 관련 조직 | 대한자강회(大韓自强會), 예수교도 8인조 |
| 관련 인물 | 이동휘(李東輝), 김동수(金東秀), 조구원(趙龜元), 오영섭(吳永燮), 김한영(金漢永), 조봉암(曺奉岩), 구연준(具然俊), 주창일(朱昌日), 고제몽(高濟夢) |
| 관련 내용 |
1905년 3월 3일 강화진위대장을 사임한 이동휘(李東輝)는 지방전도사인 김우제를 통하여 감리교에 입교하고 강화잠두교회에 나가게 되었다. 이후 1907년 군대 해산이 되자, 이동휘는 7월 24일 강화읍내 연무당에서 기독교도인 김동수·김남수형제, 허성경·김광천·김기약 등과 군중집회를 열고 격렬한 배일연설을 하였다. 7월 26일에는 연무당에서 대한자강회총회를 열고, 30일에는 전등사에서 김동수·허성경 등 기독교도와 해산된 군인 400명을 모아 합성친목회라는 대규모 반일집회를 열었다. 이후 8월 9일 강화군민의 봉기가 일어나자 수원의 일본군은 8월 11일 강화에 도착하여 진압을 시작하였다. 갑곶진 전투에서 50여 명이 사살되는 등 의병측 피해가 속출하는 한편, 강화잠두교회가 반일운동의 준동지로 지목되어 일본군이 포위를 하였다. 그리고 일진회원들은 주모자 이동휘 등을 체포한다는 명목으로 전 강화진위대원이었던 김동수 권사 3형제를 유인하여 압송하는 중 선원면 더리미에서 살해하였다. 1919년 3월 18일 강화읍 만세운동은 후 조구원을 비롯한 강화잠두교회 청년교인 6명 등은 강화읍교회에서 비밀조직을 결성했다. 이들은 독립운동 격문을 부착하고, 자유민보 등 10여 종류의 유인물을 배포하고 읍내 상인들에게 철시를 종용하였으며, 경찰로 근무하는 한국인의 각성을 촉구는 등 활동을 벌이다 4월 20일 체포되었다. |
| 참고 문헌 |
大正8年刑第1483號, 「조구원 등 8명 판결문」, 1919년 9월 30일 (CJA0000413) 이은용, 『강화중앙교회 100년사』, 강화중앙교회, 2002, 219~251쪽. 강화군사편찬위원회, 『신편 강화사』 상-역사와 전통, 강화군편찬위원회, 2003, 620·650~651쪽. 반병률, 『성재 이동휘 일대기』, 범우사, 1998, 45·47·63쪽. 김성민, 「강화지역 3·1운동의 전개와 성격」, 『한국 근현대사 연구』22, 한국근현대사학회, 2002. 강화중앙교회(http://www.kjmch.co.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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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정보
| 당시 주소 | 경기도 강화군 부내면 신문리 549 |
|---|---|
| 주소 | 인천광역시 강화군 강화읍 청하동길 36 |
| 도로명 주소 | |
| 위치 고증 | 강화중앙교회(강화 잠두교회) 홈페이지의 연혁 및 강화중앙교회 역사관 전시 자료를 통해 잠두교회 위치를 확인할 수 있으며, 이은용(강화기독교연구회 회장)의 증언을 통해 위치를 확인하였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