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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별 · 작전별 사적지 현황

횡성장터 3·1운동 만세시위지

기본정보

기본정보
사적지 분류 국내항일운동사적지
운동계열분류 3·1운동
종류 거리
상태 변형 / 횡성전통시장이 자리하고 있으나 옛 모습은 남아있지 않다.
정의 1919년 3월 27일과 4월 1일 횡성 장날에 천도교인이 주도하여 만세시위를 전개한 곳

관련정보

관련정보
관련 사건 1919 3·1운동
관련 조직  
관련 인물 윤태환/정해경/하영현/강사문/최동수
관련 내용 1919년 3월 10일경 횡성 영영포리에서 천도교 순회교사인 신재근(申在根)과 장도훈(張道勳)은 회합을 가졌다. 이들은 횡성에서 독립만세를 외치기로 합의하고 신재근은 태극기, 독립선언서를 구할 자금으로 장도훈에게 3원을 교부했다. 장도훈은 3월 11일, 12일경 경성으로 가서 종이 태극기 20기, 독립선언서 40매를 구하여 3월 26일 귀가했다. 이어 신재근과 3월 27일 횡성 장날에 독립만세를 외칠 거사를 논의했다.
3월 27일 이들은 읍하리 횡성 읍내 시장으로 가서 오전 10시~11시경 시장 입구에서 윤태환(尹泰煥)을 만났다. 신재근은 그에게 ‘오늘 신(新)시장 쪽을 독립운동을 한다. 너도 함께 만세를 불러라’고 권유하고 ‘이를 휘날려 달라’며 태극기를 교부하였다. 오후 1시경 신재근, 장도훈이 새로난 도로 쪽에 운집한 안경춘(安敬春), 강만형(姜萬馨) 등 300여 명의 군중들에게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배부했다. 이어 천도교 교도 8명, 군중 4명이 주도하여 태극기를 흔들며 군중들이 함께 조선독립만세를 외쳤다. 윤태환은 두루마기 속에 숨겨둔 태극기를 꺼내 흔들며 독립만세를 불렀고, 추병륜(秋秉倫) 등은 막대기로 잡화상 한봉구(韓奉九)의 집을 두드리며 독립만세를 소리쳤다. 이에 횡성헌병분견소 헌병들이 출동하여 주도 인사 8명을 체포하며 탄압하여 만세 군중들은 해산하였다. 이어 시장 상인들은 전부 상점 문을 닫고 철시했다. 한편 일제는 원주에서 헌병 3명과 보병 하사 이하 4명을 파견해 강계를 강화했다.
이어 4월 1일 오후 5시 횡성 읍내 시장에서 야소교 신자 정해경(鄭海璟), 천도교 교도 김성서(金聖西)의 주도로 조상렬(趙常烈), 김윤신(金允信), 전성수(全聖洙) 등 약 1,000명의 군중들이 독립만세를 외쳤다. 이에 횡성헌병분견소 헌병들이 출동해 만세를 중지시키고 해산을 강압하며 주도 인사들이 체포를 당하는 탄압을 함으로 만세 군중들은 해산하였다. 그러나 이어 오후 7시경 재차 집결한 약 1,000명의 군중들은 막대기를 휘두르고 돌을 던지며 시장터 상점들의 문을 부수고 관공서 앞의 광고판, 군청의 건물 등을 공격 파괴하였다. 헌병들이 보병 79연대 하사 이하 11명의 지원을 받아 총기를 발포하여 4명이 순국하고 3명이 부상을 당했으며 23명이 체포되는 탄압을 함으로 만세 군중들은 해산하였다.
그리고 4월 2일에도 아침부터 약 200명이 헌병분견소 앞에서 독립운동의 허가, 체포자의 석방 반환 등을 요구하며 독립만세를 외쳤다.
참고 문헌 일본육군성, 『조선소요사건관계서류』 제29보, 1919, 415쪽.
일본육군성, 『조선소요사건관계서류』 제39보, 1919, 488~489쪽.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 2, 1971, 574~579쪽.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독립운동사자료집』 5, 1972, 953~95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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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정보

지역정보
당시 주소 강원도 횡성군 횡성면 읍하리
주소 강원도 횡성군 횡성읍 문정로19번길 12-4 일대
도로명 주소
위치 고증 『조선소요사건관계서류』 등에 관련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횡성문화원 사무국장 홍성진씨의 증언을 통해 현 횡성시장이 옛 장터이며, 횡성군의회가 옛 군청 터였음을 확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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