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메뉴 영역

  • 지역별
  • 운동별

사적지 찾아보기

운동별 · 작전별 사적지 현황

양산헌병분견소 터 3·1운동 만세시위지

기본정보

기본정보
사적지 분류 국내항일운동사적지
운동계열분류 3·1운동
종류 건물
상태 멸실 / 옛 양산헌병분견소 터에는 양산시 노인회관이, 양산군청이 있던 곳에는 북부동주민센터가 들어서 있다.
정의 1919년 3월 27일과 4월 1일 두 차례에 걸쳐 3·1운동 만세시위가 일어난 곳

관련정보

관련정보
관련 사건
관련 조직  
관련 인물 박삼도(朴三道), 정주봉(鄭周奉), 이귀수(李貴守), 강재호(姜在鎬), 전병건(全秉健), 전병한(全秉翰), 류경문(柳敬文), 엄주태(嚴柱泰), 안덕원(安德元)
관련 내용 양산 중부동에 살던 엄주태는 1919년 3월 12일 분위기도 파악할 겸 부산에 갔다가 3월 13일 전개된 동래고등보통학교 학생들의 대대적인 만세운동을 목격하고 시위에 가담 그는 학생들이 뿌린 독립선언서 등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와 3월 14일 양산공립보통학교 교정에서 전병건과 만나 부산의 소식을 전하며 양산 의거를 논의하였다. 두 사람은 다시 3월 15일 엄주태의 집에서 독립선언서 5매를 등사하여 휴대하고 중부동의 박삼도·이귀수와 만나 독립선언서를 전달하며 만세시위를 제의하여 동의를 얻어냈다. 이들은 양산만세시위 거사일을 3월 27일로 결정하고 독립선언서를 대량으로 엄주태의 집에서 등사하는 등 만반의 준비를 갖췄다.

3월 27일 다른 주요 인사들과 함께 양산장터에서 3천여 명의 군중과 함께 준비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장터는 삽시간에 만세소리로 뒤덮혔고 여세를 몰아 군청을 향해 시가행진을 감행하였다. 이에 급하게 출동한 양산헌병분견소의 헌병과 순사들은 시위 군중을 저지하며 주요 인물들을 체포했고 이에 분노한 군중은 양산헌병분견소와 양산군청으로 행진하며 정문에서 대치하며 체포된 청년들을 석방하라고 외쳤다. 사태가 다급해지자 양산헌병분견소는 부산헌병분대에 지원을 요청하여 완전무장한 헌병대원으로 대치하다가 구인된 청년들의 석방을 전제로 해산을 종용하여 시위자들은 자진해산하였다. 하지만 양산헌병분견소는 다시 엄주태를비롯한 주요 인사 7명을 구인하여 부산헌병분대로 이관한 후 부산감옥에 수감시켰다. 해산한 군중은 중심 인물들이 재구속되었다는 소식을 접하고 3월 27일 만세시위에서 피신한 이귀수와 류경문 등이 중심이 되어 다시 4월 1일 오후 2시 재궐기하였다.

2,000여 명의 군중이 운집하여 양산 시가지를 누비며 만세시위를 전개하고 양산헌병 분견소로 진격하여 만세시위와 구속자 석방을 외쳤다. 이에 헌병경찰은 공포로 위협하여 중심 인물인 이귀수와 류경문 등을 구속하고 군중을 강제 해산시켰다.
참고 문헌 「양산군 읍내면 북부리 지적원도」, 조선총독부 임시토지조사국, 1912.
「朝鮮五万分一地形圖; 梁山」, 조선총독부, 1918.
「대일본직업별명세도」제194호 조선남부, 1930.
「엄주태외 6명 판결문」, 대구복심법원, 1919년 5월 28일.
「이귀수, 류경문 판결문」, 대구복심법원, 1919년 5월 19일.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3-3·1운동사(하), 1971, 211-214쪽.
양산향토사연구회,『 (증보판)양산항일독립운동사』, 양산시민신문, 2009, 75-80쪽.

지역정보

지역정보
당시 주소 경상남도 양산군 읍내면 북부동 331
주소 경남 양산시 북부동 331
도로명 주소 경상남도 양산시 북안남5길 15
위치 고증 양산읍내 3·1운동 관련자들의「판결문」을 근간으로「경상남도 양산군 읍내면 북부동 지적원도」·「朝鮮五万分一地形圖; 梁山」·「대일본직업별명세도」양산 및 물금지도를 상호 비교하여 위치를 확인하였다.

하단영역

관련사이트

주소: 충남 천안시 동남구 북천읍 삼방로 95 전화: 041-560-0441 팩스 : 041-560-0426 
 Copyright 2014 THE INDEPENDENCE HALL OF KOREA All rights reserved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