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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별 · 작전별 사적지 현황

의령장터 3·1운동 만세시위지

기본정보

기본정보
사적지 분류 국내항일운동사적지
운동계열분류 3·1운동
종류 거리(시장)
상태 멸실 / 의령장터는 현재 상설시장이 되었고, 군청·경찰서·의령향교는 당시 있었던 곳에 그대로 존재한다.
정의 1919년 3월 14일부터 16일까지 의령군 의령면 면민들이 구여순의 주도로 독립만세시위를 벌인 곳

관련정보

관련정보
관련 사건 1919.3.14~16 의령군 의령장터 독립만세시위/1919.3.14 의려군 의령공립보통학교 학생 독립만세시위/1919.3.15 의령군 의령향교 앞 독립만세시위
관련 조직  
관련 인물 여순(具汝淳)/정용식(鄭容軾)/최정학(崔正學)/이우식(李祐植)/김봉연(金琫淵)/강제형(姜齊馨)/안의인(安義人)/정봉균(鄭奉均)
관련 내용 의령군 의령면 동동에 살았던 구여순(具汝淳)은 서울에서 일어난 만세시위에 참여하고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귀향했다. 구여순은 친구 정용식(鄭容軾)·최정학(崔正學)·이우식(李祐植)·김봉연(金琫淵) 등과 의령에서의 만세시위에 대해 논의하였다.

이들은 의거일을 3월 14일 의령 장날로 정하고, 각각 분담하여 비밀리에 태극기를 만들었다. 구여순·최정학은 비밀리에 용덕면장 강제형(姜齊馨)을 찾아가 의거 계획을 설명하고 독립선언서 인쇄에 면사무소 직원들의 협력을 요청하였다. 면장은 쾌히 승낙하였다. 구여순·최정학 등은 동지를 규합하는 한편, 의령공립보통학교 학생들에게도 시위에 참여할 것을 권유하였다. 3월 14일 만세시위가 시작되자 의령공립보통학교 학생을 중심으로 300여 명의 군중들이 먼저 호응하였다. 이날 참가 인원은 3,000여 명이었다.

다음 날인 15일 비밀 연락에 따라 의령향교 앞으로 다시 모인 군중들은 1,000여 명에 이르렀다. 이날 의령군청 직원인 안의인(安義人)·정봉균(鄭奉均)은 의거가 일어나자 시위대열의 선두에 서서 독립만세를 외쳤다. 15일 만세시위가 끝난 후 일군 군경이 시위 주모자들을 검거하였다. 이 소식을 전해 듣고 다시 모인 700여 명의 군중들은 오후 4시경 경찰서로 몰려가 검거된 주모자들을 석방하라고 요구하였다. 이때 마산의 일본군 포병대대 7~8명이 급파되어 경찰과 협력하며 군중들을 총검으로 위압, 해산시키고 다시 주모자 10명을 검거하였다.

16일에도 의령장터에서 만세시위가 계속되었으나, 다시 진주로부터 일본군 응원부대가 와 군중들을 총검으로 탄압함으로써 시위는 더이상 진전되지 않았다.

의령장터에서의 만세시위로 검거된 인원은 100여 명에 달하였으나, 이 가운데 30명이 징역형을 언도 받아 진주·대구·서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참고 문헌 「정호권 판결문」, 1919년 6월 5일, 국가보훈처 공훈전자사료관.
「구여순 등 9인 판결문」, 1919년 7월 15일, 국가보훈처 공훈전자사료관.
「정호권 판결문」, 1919년 7월 17일, 국가보훈처 공훈전자사료관.
朝鮮總督府 臨時土地調査局, 「宜寧郡 宜寧面 中東里 地籍原圖」, 1914.
朝鮮總督府, 「朝鮮五万分一地形圖 ; 宜寧」, 1926.
경상남도 경찰부, 『고등경찰관계적록』, 1936, 11쪽.
朝鮮憲兵隊司令部, 『(大正9年)騷擾事件狀況』, 1919, 106쪽.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자료집』 6, 1973, 553쪽.
한국문화원연합회 경상남도지회, 『경남지역 3·1독립운동사』, 함안군·한국문화원연합회 경상남도지회, 2007, 131~132쪽.

지역정보

지역정보
당시 주소 경상남도 의령군 의령면 중동리
주소 경남 의령군 의령읍 중동리 419·195·216
도로명 주소
위치 고증 「정호권 판결문」·「구여순 등 9인 판결문」 등에 관련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조선오만분일지형도 ; 의령」·「의령군 의령면 중동리 지적원도」를 통해 의령장터의 위치 확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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