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별 · 작전별 사적지 현황
소수경찰주재소 터 3·1운동 만세시위지
기본정보
| 사적지 분류 | 국내항일운동사적지 |
|---|---|
| 운동계열분류 | 3·1운동 |
| 종류 | 건물 |
| 상태 | 멸실 / 2008년 조사 당시 경찰주재소 자리에 있었던 집들이 모두 철거되고 밭으로 변하였다. |
| 정의 | 1919년 4월 2일 괴산군 소수면 면민 200여 명이 독립만세시위를 벌인 곳 |
관련정보
| 관련 사건 | 1919.4.2 괴산군 소수경찰관주재소 앞 독립만세시위 |
|---|---|
| 관련 조직 | |
| 관련 인물 | 유해륜(柳海崙)/경권중(慶權重)/송능식(宋能植) |
| 관련 내용 |
소수면 만세시위는 유해륜·경권중·송능식 등이 주도하였다. 유해륜과 경권중은 사전 논의 끝에 4월 2일 길선리에 거주하는 소수면장과 경찰주재소 앞에서 만세시위를 벌이기로 결의하였다. 이에 1919년 4월 2일 소수면 500여 명의 주민들은 면장 김승환의 집과 경찰주재소 앞에서 만세를 부르며 시위를 전개하였다. 유해륜은 구장 경권중에게 마을 주민의 동원을 부탁을 하였고, 이에 경권중은 주민들을 이끌고 시위대에 합류하였다. 송능식은 시위대의 선두에 서서 태극기를 흔들며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일제 경찰에 체포된 유해륜과 경권중은 각각 징역 10월, 송능식은 징역 6월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는데, 특히 경권중은 병보석으로 석방된 직후인 1920년 3월 8일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1990년 유해륜에게 애족장, 1991년 경권중에게 애국장, 1996년 송능식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
| 참고 문헌 |
조선총독부, 「음성」, 『근세한국오만분지일지형도』, 1918. 「유해륜 외 2인 판결문」(1919년 4월 23일, 공주지방법원 청주지청). 「유해륜 외 1인 판결문」(1919년 5월 16일, 경성복심법원). 「유해륜 외 1인 판결문」(1919년 6월 2일, 고등법원). 「朝鮮總督府 內秘補 460; 忠北機第276號」, 1919년 4월 8일, 『大正八年 騷擾事件ニ關スル道長官報告綴』 4. 「朝憲警 第107號: 朝鮮騷擾事件一覽表에 關한 件」, 1919년 10월 2일, 『朝鮮騷擾事件關係書類』1. 「騷擾事件의 後報, 충청북도 槐山, 각 면에서 소요」, 『매일신보』, 1919년 4월 6일. 「騷擾事件의 後報, 충청북도 槐山, 수모 사명 체포」, 『매일신보』, 1919년 4월 7일.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자료집』 5, 1971, 1078~1079쪽.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 3, 1971, 60~61쪽. 박걸순, 『괴산지방 항일독립운동사』, 괴산문화원, 1996, 114쪽. 오대록, 「괴산지역 3·1운동의 전개와 의의」, 『충북의 3•1운동, 그 기억과 기념』, 충북연구원, 2019, 71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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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정보
| 당시 주소 | 충청북도 괴산군 소수면 길선리 |
|---|---|
| 주소 | 충북 괴산군 소수면 길선리 138 |
| 도로명 주소 | |
| 위치 고증 | 「유해륜 등 3인 판결문」 및 「유해륜 등 2인 판결문」 등에 관련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이재화(입암리 거주, 67세)와 이옥출(길선리 거주) 등 주민들의 증언을 통해 당시 위치를 확정할 수 있었다. |














소수면사무소 습격 관련기사(『매일신보』, 1919년 4월 5일)
소수면 만세시위 주모자 관련기사(『매일신보』, 1919년 4월 4일)
소수면 만세시위 관련기사(『매일신보』, 1919년 3월 29일)
소수만세운동유적비
소수경찰주재소 터 전경
소수면사무소에서 소수경찰주재소 가는 길
소수면사무소 터 전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