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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별 · 작전별 사적지 현황

철원 3·1운동 만세시위지

기본정보

기본정보
사적지 분류 등급분류 제외(국가수호)
운동계열분류 3·1운동
종류 거리
상태 변형 / 옛 철원읍은 군사분계선 지역으로 민간인의 출입이 통제되고 있다. 또한 6·25전쟁 때 완전히 파괴되어 옛 모습은 찾아볼 수 없다.
정의 1919년 3월 10일과 11일에 철원 주민들이 만세시위를 전개한 곳

관련정보

관련정보
관련 사건 1919 3·1운동
관련 조직 철원청년회 
관련 인물 박연서(朴淵瑞)/이배근(李培根)
관련 내용 철원군에는 1919년 3월 2일과 3일에 천도교인들에 의해 독립선언서 200매가 배포되고, 고종 인산에 참례했던 사람들이 일찍 귀향하게 되면서 만세시위 분위기가 일찍 조성되었다. 그러나 일제 관헌에게 관련자들이 발각되어 주도자 11인이 체포됨으로써 시위를 일으키지는 못하였다.

이러한 가운데 3월 7일 철원감리교회 목사 박연서가 학생·교사·전도사들에게 시위 정보를 제공하고, 인쇄업자 이배근이 철원농업학교 학생들에게 시위를 권유하게 되면서 만세시위가 다시 추진되었다. 이에 철원농업학교와 철원보통학교 학생, 그리고 철원청년회 회원들이 만세시위를 추진하였다.

1919년 3월 10일 오후 3시경 학생 주도자들은 약 250명의 군중과 함께 서문거리에서 대한독립만세를 부르며 시위하였고, 학생들은 북간산(北看山)을 돌며 시위하였다. 철원감리교회와 철원청년회 청년들이 동원한 약 500명의 군중은 오후 4시경 철원읍내를 누비고 철원군청으로 모였다. 군중은 대한독립만세를 외치고, 주도자들은큰 깃대에 태극기를 달아 군청 현관 앞에서 독립만세를 불렀다. 헌병분견소를 거쳐온 학생 시위대도 가세하였다. 군중은 철원군수 오태환(吳台煥)과 일본인 서무주임에게 독립만세를 부르게 하였다. 일부 군중은 한성판윤은 지낸 친일파 박의병(朴義秉)의 집으로 달려가 박의병에게 독립만세를 부르게 하였다. 그리고 다음날 다시 모이기로 하고 군중은 해산하였다.

3월 11일 아침 다시 서문거리에 모인 군중은 철원역으로 향했다. 약 700명의 군중은 철원역에서 대한독립만세를 부르며 시위하고 다시 철원읍으로 들어와 시위를 벌이기로 했다. 철원농업학교와 철원보통학교의 학생들도 중간에서 합세하여 시위 행진하였다. 시위 군중이 서문거리에 이르렀을 때 기마 헌병이 총을 쏘기 시작했다. 총소리에 군중의 대열이 흩어졌다. 주도자 18명이 체포되었는데, 그 중에는 여자 6명이 포함되었다.
참고 문헌 「근세한국오만분지일지형도」, 조선총독부, 1918.
「독립운동에 관한 건(제13보)」, 1919년 3월 12일 ; 국회도서관,『한국민족운동사료』3·1운동편 3, 1979, 45쪽.
「이학수 등 판결문」, 1919년 11월 10일, 국가보훈처 공훈전자사료관.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독립운동사』2, 1971, 530∼536쪽.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독립운동사자료집』5, 1972, 916∼921쪽.
광복회 강원도지부, 『江原道抗日獨立運動史』Ⅲ, 1992, 314∼319쪽.

지역정보

지역정보
당시 주소 강원도 철원군 철원면 궁전리
주소 강원 철원군 철원읍 외촌리 620
도로명 주소
위치 고증 『독립운동사자료집』5권과 「이학수 등 판결문」등에 관련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옛 철원읍은 현재 분계선 지역이며, 1918년 발행된 1:50,000(1918) 지도를 통해 그 위치를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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