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별 · 작전별 사적지 현황
이석용 생가
기본정보
| 사적지 분류 | 국내항일운동사적지 |
|---|---|
| 운동계열분류 | 의병전쟁 |
| 종류 | 가옥 |
| 상태 | 복원 / 복원되어 현재 상태는 양호하나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고 있다. |
| 정의 | 호남의병창의동맹단을 결성하여 의병대장으로 활동하다가 옥중에서 순국한 이석용이 태어난 곳 |
관련정보
| 관련 사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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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련 조직 | |
| 관련 인물 | |
| 관련 내용 |
한말 전라도지역의 대표적인 의병장 이석용(李錫庸, 1878~1914)은 지금의 임실군 성수면 삼봉리에서 3대 독자로 태어났다.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제가 강제로 을사조약을 체결하자, 이석용은 1906년 임실·장수·진안·남원·함양·순창·곡성 등지에서 동지를 모으고, 조정을 비롯한 전국의 동포와 일본정부, 그리고 세계열강에 격문·통고문·규탄문·건의문 등을 보내 민족의 주권확립에 노력하였다. 이어 1907년 군대가 강제로 해산당하자 같은 고향 출신으로 당시 장수에 거주하고 있던 전해산과 더불어 함께 거의, 토적할 것을 의논하였다. 이 때 기삼연(奇參衍)이 영광에서 회맹하여 호남창의맹소(湖南倡義盟所)를 구성하자, 여기에 참여하여 전해산과 함께 종사가 되었다. 그러나 최익현과 임병찬 등이 체포되고, 태인의병이 흩어지자, 이석용은 뒤에 연합할 것을 기약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동지들과 창의준비에 몰두하였다. 드디어 호남의병창의동맹단이라 이름지은 의병을 일으킨 그는 1907년 9월 12일 마이산 남쪽 기슭의 용암 위에 설단제천(設壇祭天)하여 궐기대회를 갖고 의병대장에 추대되었다. 이후 이석용이 이끄는 의병은 진안·용담·정천·임실·순창 등지를 거쳐 태인·남원 등지에서 전투를 벌인 뒤 임실로 되돌아와 의진을 재편하였다. 이후로도 여러 곳을 종횡무진하며 일본군과 맞서 여러차례 전투를 벌였다. 그러나 일본군 1만여 명이 대대적인 호남의병 토벌에 나서자, 의미없는 희생을 피하기 위해 그는 1909년 3월 거느리고 있건 의병을 해산하고, 여러곳을 유랑하였다. 그러다가 1913년 겨울 붙잡혀 1914년 4월 대구에서 교수형으로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
| 참고 문헌 |
「이석용 판결문」, 고등법원, 1914년 4월 16일. 『신한민보』, 1914년 5월 14일, 2면 3단, 「의병장 이석용 공판」. 『신한민보』, 1914년 5월 28일, 2면 3단, 「의장 이석용 공판」.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편,『 독립운동사』1-의병항쟁사, 1970, 601-602쪽.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자료집』2-의병항쟁사자료집, 1971, 507-560쪽. 전북향토문화연구회,『 전북의병사』하, 전북향토문화연구회, 1992, 169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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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정보
| 당시 주소 | 전라북도 임실군 상동면 삼보리 |
|---|---|
| 주소 | 전북 임실군 성수면 삼봉리 676 |
| 도로명 주소 | 전라북도 임실군 성수면 삼봉3길 56-3 |
| 위치 고증 | 「이석용 판결문」에 관련 사실과 주소가 기록되어 있다. 복원된 생가 마당에 세워진 안내판 등을 통해 이곳이 이석용의 생가 터임을 확인할 수 있다. |














이석용
이석용 생가 측면
이석용 생가 원경
이석용 생가 전좌
이석용 생가 정면